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94 |
보스톤코리아 2015-08-24, 13:15:53 |
1972년11월 착공 1년만에 완공된 국기원은 가히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정신이 흠뻑밴 군사작전을 방불케한 공사였다. 김운용의 뛰어난 추진력과 박종규 경호실장(당시 그는 IOC위원이었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단시일내에 완공되었다. 당시 무도인들의 처지나 인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를 김용채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당시의 예산 3,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하여 김운용이 기부금을 얻어오고 태권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박종규가 나서면서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이 국기원 건립이다.135) 이 국기원 건립의 밑 그림은 이종우와 엄운규가 구상하였다. 일본의 ‘국기관’을 본따서 설립을 추진하였다. 즉 태권도내의 파벌시대를 종식하고 대한태권도협회 산하의 모든 관과 도장을 한군데로 묶으려는 시도였다. 그들이 김운용을 앞세워 시도한 국내 태권도계의 천하통일은 이루어졌고, 우리나라의 태권도는 스포츠화로 빠르게 변모하면서 올림픽 정식종목을 향하여 질주하였다. 몇몇 정치성향의 태권도인들이 주도하여 김운용을 앞세운 통합에 반대하거나 소외된 무도인들은 ‘낙향’ 또는 이민 등으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무도상武道想을 펼치려고 했지만 박종규의 지원으로 힘입은 경기화의 대세는 순진무구한 무도인의 ‘이단옆차기와 손날 막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완공된 국기원의 초대원장은 물론 김운용이 추대되었으며 그후 30년이 넘도록 구축된 철옹성은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136) 국기원의 외형적인 설립 목적은 태권도의 범 국민운동화와 태권도의 기술과 정신을 전세계에 보급함에 있다(국기원이 하였든 일선의 태권도 사범들이 하였든 그 후 태권도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급되어 국위선양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기원의 주 업무가 승단심사가 되면서 국기원을 ‘단증공장’이라고 부르는 태권도인들도 있다. 국기원의 개원과 함께 태권도의 지도가 각 학교로 널리 보급되고 동시에 많은 사범들이 국외에서 태권도를 세계인의 호신술과 정신수양의 도구로 매료시키면서 많은 유단자들을 양산하게되었고, 국기원은 그 승단심사비로 예산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 심사비가 없었다면 국기원의 원할한 운영은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특히 미국의 지도자들이 국기國技 보급 통하여 국위를 선양한다는 자긍심으로 한 지원을 간과看過하면 아니될 것이다. 1973년5월25 ~ 27일 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개국이 참가한 그 대회는 태권도의 종주국을 공식적으로 세계에 주요국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물론 각국의 대표단장과 코치는 거의 우리나라 사범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후 세계대회는 격년으로 개최국을 전세계로 순회하면서 치루고 있다. 강남의 허허벌판 언덕위에 지어진 국기원에서 첫 ‘기합’을 지르며 펼쳐진 세계대회, 태권도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 준 선물이다. 이제는 김치, 불고기, 된장 그리고 한류와 함께 단연코 으뜸가는 한국의 심볼이며 자랑이다. 그리고 28일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WTF)가 창립되었다. 창립당시 35개 회원국이 205개국(2012년)으로 늘어났고 공식언어는 한국어이다. 현재 전세계 태권도 인구수는1억을 돌파하고 있다. 종주국인 우리나라 다음으로 미국, 중국, 이란 순으로 많은 수련생들이 김치와 불고기를 먹으며 대한민국을 배우고 있다.137) 135) 김운용은 국기원을 지으면서 사재를 사용한 것으로 말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물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일반 태권도인들이 모을 수 없는 액수의 기부금과 자재의 협조를 받았고 서울시의 부지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면이 오히려 성과에 상응하는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태권도인들은 능력이 없으니까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비틀린 확신이 커지고 장기화 되면서 종말에는 구속까지 되는 수모를 겪었다. 136) 김운용은 국기원이 준공된 1972년 부터 2004년1월까지 원장으로 재임하였고, 그 후 2대 엄운규, 3대 이승완, 4대 강원식, 5대 이규형, 6대 정만순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운용 이후 10여년간 5명의 원장이 재임하면서 외형적으로는 민주화가 되어서 여러명이 공평하게 하는 것 같지만 내용면에서 사업의 지속성과 일관성 등 사라진 김운용의 카리스마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137) 참고문헌: ‘세계를 향한 도전’(김운용, 2002, 연세대학교 출판부), ‘태권도 – 역사,정신,철학’(안용규, 2000, 21세기사), ‘스포츠와 권력: 김운용, 그 이후’(안용규, 2008년5월5일, 태권마루), ‘<태권도 황제> 김운용 날개 꺾인 30년 신화’(육성철, 신동아 2001년12월호),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 충격적 고백!’(육성철, 신동아 2002년4월호) 등 김운용이 몸담았던 기구의 약사略史와 기타 언론매체.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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