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주州의 탄생 – 분열과 타협, 그리고 분열
보스톤코리아  2015-08-19, 12:06:07 
1821년 8월 10일, 미주리 (Missouri)가 미국의 24번째 주로서 연방에 가입했다. 미주리는 1803년 미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 영토*의 일부였다. 건국 초기부터 미국은 1785년의 공유지 조례( Land Ordinance Act, 1785)와 1787년 북서부 조례 (Northwest Ordinance, 1787) 등에 근거하여 준주 (準州, Unorganized territory 즉 미국의 영토지만 주State 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지역)의 인구가 60,000명 이상이 되면 주의 자격으로 연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북서지역의 준주들도 하나씩 주의 자격으로 연방에 편입되고 있었기때문에, 어느 영토가 주 State로 승격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건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을게다. 하지만 미주리주의 탄생은 19세기 미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영국과 치른 "제 2의 독립전쟁"인 1812년 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에는 바야흐로 다양한 종류의 미국식 민족주의 (American Nationalism)이 부상했다. 미국인들이 스스로를 어느 주의 주민으로서보다는 미국인으로 정체화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유럽과는 다른 미국의 것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문학과, 철학, 예술 속에도 자리잡아갔다.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연방주의당(Federalist Party)와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 정치인들이 전혀 다른 의견을 내세웠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미전쟁에 반대했던 연방주의당의 정치력은 급격히 몰락했다. 급기야 연방주의당은 1820년 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새 대통령 제임스 먼로(민주공화당)가 과거 연방주의당의 본산지였던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 보스턴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반겼다. 신문들은 "Era of Good Feelings"(화해의 시대)라는 표현을 쏟아냈다. 

미주리주의 탄생은 바로 그 미국식 민족주의, 혹은 화해의 시대의 정점에 자리해있으면서도, "화해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분열과 화합 혹은 봉합이 함께한 사건이었다. 역설적이게도, 화해의 시대 미국인들은 동부와 서부 남부 간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혹은 지역주의 (Sectionalism)을 확인했던 탓이다.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목전에 둔 1819년 2월, 민주공화당의 의원으로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던 제임스 탈미지 (James Tallmadge)는 한 세대 안에 노예제를 종식시킬 것을 목적으로, "새로운 노예제 도입을 금지하며, 노예의 자녀로 태어나 준주에 거주하던 노예들도 준주가 주로 승격되어 연방에 편입됨과 동시에 혹은 25세 이상 성인이 되면 자유인이 되어야한다"는 내용의 탤미지 수정 Tallmadge Amendment 법안을 발의했다. 이에 대해 남부의 노예주 대표들은 탤미지 수정이 노예제를 종식시키려는 북부의 음모라고 반발하고, 미주리를 연방에 가입시키되 미주리에서 노예제를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1820년 무렵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된 (혹은 처음부터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았던) 11개의 북부 자유주 (Free State)와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11개의 노예주가 있기 때문에, 또한 미주리가 자유주와 노예주의 경계의 연장선에 있었기때문에, 미주리의 연방 가입문제는 노예제 존치 여부를 둘러싸고 노예주와 자유주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난항을 겪게 되었다. 

해법은 "대타협의 아버지 Great Compromiser"인 헨리 클레이로부터 나왔다. 당시 매사추세츠의 일부였던 메인을 독립된 주로서, 자유주의 자격으로 연방에 가입시키고 미주리는 노예주로서 연방에 가입시키는 것, 그리하여 현재의 11:11 균형을 12:12로 유지시키는 안이었다. 

1820년 의회에서 통과된 미주리 대타협 (Missouri Compromise)에는 노예주와 자유주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안 외에 더 중요한 조항이 들어있었다. 즉, 앞으로 미주리의 남쪽 경계인 북위 36°30′ 북쪽의 준주/영토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미주리 대타협은 북부인들에게도 남부인들에게도 어느정도 만족할만한 해법이었다. 북부인들 입장에서 루이지애나 매입 영토의 대부분을 노예제로부터 지켜냈다는 점, 그리고 준주에서의 노예제 확산을 방어할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이 그러했다. 남부인들에게도 어쨌거나 노예제 확산을 방어한 북부영토는 기후상 면화 플랜테이션과는 관계없는 곳이었고, 미주리를 노예주로 연방에 가입시켰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이었다.  

그렇게해서 남과 북간의 혹은 자유주와 노예주간의 대립은, 화해의 시대다운 대타협을 이끌어냈고, 그리하여 미주리 주가 탄생했다. 분열을 극복한 타협이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전야, 미주리는 다시 화약고가 된다.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에서 의회가 개인의 사유재산 문제에 관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준주에서의 노예 소유 문제를, 미주리 대타협에서처럼 의회가 제한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기되었다. 드레드 스콧 판결이 내려진 이듬해 일리노이 상원 선거에서 스티븐 더글라스는 노예제 허용 여부는 각 주가 결정할 주의 자치권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연방 Union의 결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링컨은 드레드 스콧 판결에서 보듯, 의회의 힘이 준주에 미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링컨은 1858년의 상원의원선거에서 패했지만,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남부의 어떤주도 링컨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링컨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남부 주들이 "주의 권리"를 내세우며 연방을 탈퇴하면서 벌어진 남북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그 남북전쟁 동안 미주리는 델라웨어, 매릴랜드, 켄터키와 함께 노예제가 존재하지만 연방을 탈퇴하지 않은 경계주 (Border State)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전쟁동안 미주리 주 내부에서는 노예제 폐지론자와 찬성론자들이 서로 갈등했다. 분열의 역사였다. 

• 1803년의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은 오늘날의 루이지애나뿐만 아니라 미시시피강 서쪽의 아칸사스, 미조리, 오클라호마, 캔자스, 네브라스카, 그리고 미네소타 일부지역과 사우스 다코타 놀스다코타의 대부분 등 미국 영토의 15개 주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 매입이었다. 쉽게말해 북쪽으로는 캐나다 접경에서 남쪽으로는 멕시코의 접경까지, 서쪽으로는 미시시피까지, 그야말로 미국의 당시 영토를 하룻 밤 새 두 배로 늘린 사건이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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