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3. 유럽인들의 정착촌 건설 (3) |
보스톤코리아 2015-07-06, 11:58:47 |
영국 버지니아 식민지 이주민과의 충돌 (계속) 인디언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인들도 인디언 마을과 옥수수 밭을 파괴하였으며 1623년에는 평화회담을 열기 위하여 많은 원주민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건배용 술잔에 독약을 타서 한꺼번에 200명을 독살시키기도 하였다. 1624년에는 활로 무장한 800명의 인디언들과 총검으로 무장한 60명의 영국인들이 맞붙었었는데 수적으로는 원주민이 월등 앞섰으나 활과 총칼의 대결에서는 총칼이 이길 수밖에 없는 법이다. 원주민들의 옥수수 밭이 크게 파괴된 뒤에 인디언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1632년 9월 양 진영 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기 전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그 전쟁 와중에 영국 정착민들은 그들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1634년에는 그들이 확보한 정착지를 인디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버지니아 반도를 가로질러 약 10km에 달하는 방책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2차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 지난 1644년 3월 세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우하탄 연맹은 남아 있는 전사들을 모두 규합하여 유럽인들의 정착 마을을 공격하여 약 500명을 죽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착민들은 본격적인 인디언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포우하탄 연맹소속의 부족은 물론이고 인근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까지 공격하여 주변에 거주하던 인디언 세력을 궤멸시켰다. 이로써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었던 영국인과 포우하탄 인디언과의 전쟁은 끝났다. 유럽인들과 가장 먼저 접촉하였던 포우하탄 부족은 지금은 Powhatan County라는 행정구역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 부족의 정체성은 역사 속에 거의 묻혀버린 상태이다. 반면에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백인과 대결하게 된 대평원지역에 거주하던 부족들은 그들의 문화 등 정체성을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잘 보존하고 있다. 북동부 해안지역에 나타난 유럽인들 영국인들이 최초로 미국 남동부의 버지니아에서 정착촌을 개척하기 시작한 1600년대 초에 북동부 지역인 뉴잉글랜드와 뉴욕 지역에서도 유럽인들이 현지의 인디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뉴욕 지역으로 진출하여 인디언들과 야생동물 모피 교역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한편 영국인들은 뉴욕의 북쪽에 위치한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 지역을 탐험하면서 여러 가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물물교환 형식으로 인디언들과 교역을 해왔는데 때로는 인디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서인도제도나 유럽으로 팔아넘김으로써 항해 이윤을 불리기도 했다. 1614년에 영국 탐험가 존 스미스의 대원인 토마스 헌트에게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인근에서 납치되어 스페인으로 노예로 팔려 갔던 스콴토가 구사일생 끝에 1619년 고향으로 돌아 왔는데 훗날 그 지역에서 정착촌 건설을 시작한 영국인들에게 생명의 은인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화는 미국 건국 초기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 스콴토가 플리머스로 돌아와 보니 자기네 부족민의 대부분이 유럽인들이 전염시킨 천연두 또는 렙토스피로시스와 같은 질병으로 인하여 죽고 없는 상태에 있었다. 1610년대에 유럽인들과 접촉하였던 북동부 해안 마을의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새로운 전염병에 대하여는 아무런 면역력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죽음으로 내몰렸다. 한 마을의 인구가 전멸하는 경우도 속출하여 북동부 해안에는 버려진 마을이 즐비하였으며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플리머스 인근의 원주민들의 세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 원주민들로부터 큰 저항 없이 정착촌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스콴토 일화 많은 경우 미국 건국 역사의 시발을 1620년 말에 플리머스에 도착한 102명의 이민자에게서 찾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홀랜드로 이민 갔던 무리들중 일부가 홀랜드에서 다시 미국으로 이민 길에 올랐던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철저하였던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은 스스로를 성자(Saint)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을 이방인(Strangers)이라고 불렀다. 102 명이 모두 분리주의자는 아니었으며 경제적 이유 등 다른 목적으로 신대륙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끼여 있었다. 이들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1620년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Plymouth)를 출발했다. 메이플라워(May- flower)호는 길이 30 미터의 목조 범선이었다. 청교도들은 66일간의 길고 위험한 항해 끝에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코드(Cape Cod) 해안을 발견했다. 그곳은 그들의 당초 목적지인 허드슨 강 입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항해하기에는 너무 늦은 계절이라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인근 지역을 탐사한 뒤 12월 20일 보스턴에서 동남쪽으로 40마일쯤 떨어진 플리머스록(Plymouth Rock) 해안에 내렸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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