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2 |
보스톤코리아 2015-05-25, 11:25:15 |
최홍희는 1965년 말레이시아 대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태수도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협회의 명칭을 자신이 목숨같이 소중히 여기는 명칭인 ‘태권도’를 써서 그 협회를 ‘대한태권도협회’로 개명하였다. 결국 그 사건으로 ‘태권도’라는 생소한 명칭을 받아드리지 못했던 대부분의 당수도/공수도 골수파들과의 갈등으로 회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하였다. 그 후 그는 정부의 요구로 친선사절단을 인솔하여 서독, 이탈리아, 터키, 아랍연맹,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순방시범 하며서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이 사절단이 우리나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지원 아래 ‘태권도’를 세계적으로 널리 전파하였으며 태권도가 우리의 고유무술이라는 것을 공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6년 3월 22일, 이 날은 태권도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거둔 첫 성과를 이룬 날이자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웅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날이다. 이날 구 조선호텔에서 그간 최홍희가 시범단을 이끌고 다니면서 홍보하고 전파한 9개국(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서독, 터키, 이탈리아, 아랍연맹, 이집트)이 모여서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 ITF)를 창설하였다. 이 기구가 우리나라가 주동이 되어 창설한 최초의 국제기구이다. 최홍희의 야심찬 기획인 “태권도를 온 천하에 뻗치라” 라는 모토로 그는 죽는 날까지 태권도와 함께 살았다. 물론 이 연맹의 총재는 최홍희가 맡았다. 그리고 1967년에는 각 도장마다 서로 다른 품세에서 오는 혼란을 막기위하여 새로운 품세를 만들었으며(각 관의 공통점을 취하고 상이한 동작은 버리면서 당시에는 가라데의 동작을 많이 차용하였다. 70년대에도 많은 도장에서 가라데 품세를 했으며 명칭도 일본어였다. 1987년 전에는 ‘품세’로 썼고, 그 이후에는 ‘품새’로도 쓴다) 1968년에 ITF는 29개국이 참가하는 제1회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를 홍콩에서 개최하였다. 1969년에는 팔괘품세가 제정되었으며, 태권도계의 ‘우리말 용어’를 채택했다. 1970년 그는 오른팔인 남태희와 태권도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2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를 떠돌았다.(물론 최홍희는 자신의 삶이 곧 태권도이기에 혼신을 다해 태권도를 보급하였다고 주장한다) 최홍희는 자신이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하여 총재가 되어서 그간 세계적으로 이룩한 업적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으로 달성되었다고 선전되자 이에 반발하였다. 무엇보다 최홍희는 박정희를 신뢰하지 않았고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의 자서전 ‘태권도와 나’ 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등을 고려해보면 나이는 박정희(1917년 11월 14일생)가 한살 많지만 군軍에서는 최홍희(1918년 11월 9일생)가 선배다. 그래서 5.16 군사정변 전까지는 박정희가 최홍희를 ‘각하’라고 부르며 선배 장군으로 대우했다. 그리고 5.16정변 이후 세상은 변했지만 최홍희의 자존심은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5.16정변 거사 당일의 소외로 부터 시작한 그가 당한 배신감과 불신은 최홍희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후 3선개헌의 반대 등 여러가지의 정치, 정책에 반대하면서 반목은 깊어만 갔고 최홍희의 입지는 권력앞에서 좁아져만 갔다. 1971년 1월, 좁아져만 가는 최홍희의 입지는 40세의 젊은 김운용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물론 당시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극적으로 전환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교관 출신의 김운용金雲龍(1931년 3월 19일 - , 어릴적 그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그의 멘토인 외교관 홍재익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4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다니며 외교관을 꿈꾸던 그는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무산되고 보병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그 후 그는 주미대사관 참사관을 지냈으며, 유엔대표부 참사관 등의 외교관 근무를 하던 중 갑자기 소환되어 청와대 경호실보좌관을 거쳐 학술원 원장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운용에 대해서는 ‘태권도와 김운용’ 편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 제7대 대한태권도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최홍희의 주장에 의하면 김운용은 국제태권도연맹(ITF)에 전혀 협조하지 않고 사사건건 반대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운용은 자신의 인맥과 능력으로 협회운영의 입지를 넓히면서 동년 3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으로 부터 친필 휘호인 ‘국기 태권도’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무도계의 각 문파간의 이질성을 줄이면서 그들을 ‘태권도’라는 무도아래로 모두 모았다. 이것이 태권도의 실질적인 대통합이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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