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보스톤코리아 2015-04-18, 16:20:07 |
베링 해를 건너온 몽골계 유목민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에서 감독과 주연을 함께 맡아 열연했던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는 1995년에 제작된 8부작 TV용 다큐멘터리 영화 ‘500 나라들(500 Nations)’의 호스트가 되어 인디언의 역사를 찾아 간다. 코스트너는 그 영화의 모두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진실은, 우리가 말할 가치가 있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길이 경축할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럽인들이 이 땅에 오기 훨씬 전에 북아메리카에는 이미 500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들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또 북극권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까지 북미대륙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300개가 넘는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인구는 수천만 명에 달하였다. 이들 중 대다수는 최고로 발달한 대도시에 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 왔으며 또 어떻게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에 관하여 조명하고자 한다. 과거 역사에는 유쾌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우리는 그 역사를 고칠 수도 없으며 역사의 시계를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제대로 열게 되면 원래의 이 땅 주인들에게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정당한 역사적 인식과 존경심을 돌려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대체로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지금부터 약 1만 8천년 전으로 보고 있다. 1970년대에 펜실베니어주의 Meadowcroft Rockshelter에서 고대 주거흔적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뉴멕시코 주의 Clovis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물에 근거하여 그 시기를 13천 년 전 정도로 추정하였는데, Meadowcroft Rockshelter 유적 발견으로 최초의 인류 출현 시기가 1만 8천년 전으로 더 앞당겨졌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는 몇 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는데 이 중 제일 마지막 빙하기는 11만 년 전부터 1만5천 년 사이에 있었으며 1만8천 년 전 무렵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빙하시대에는 해수면이 낮아져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베링해협에 막혀서 쉽게 건너갈 수 없으나 당시에는 교량처럼 연결된 육지 통로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대륙 사이를 오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대륙의 북동부에 살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이 대거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서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 고고인류학자들은 또 다른 유적지 발굴을 근거로 최초의 인디언 출현 시기를 5만 년 전까지로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최초의 인디언들 중 일부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서 이주해 왔거나 그린란드를 경유하여 유럽 쪽에서 건너왔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이주 이전의 인디언 인구수에 관하여도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전체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 인구를 1억 명 이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인구는 2~3백만 명 수준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당시의 정확한 인구수를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옥수수 문명 북미대륙에서 최초의 인류 문명은 중앙아메리카(Mesoamerica)에서 시작되었다. 문명 출현 배경에는 이른바 '세 자매(three sisters)'가 자리하고 있다. 세 자매란 아메리카산 호박(squash), 옥수수(maize, corn)와 콩(bean)을 일컫는 말로서, 고대 인디언들을 이 세 종류의 작물을 함께 조화롭게 재배하는 독특한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농경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농산물 생산을 극대화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세 자매중 특히 옥수수는 인디언의 생존과 문명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옥수수를 포함한 세 자매 작물 농업은 중앙아메리카에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퍼져 나가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종류의 문명 건설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인디언 부족들의 기원에 관한 신화에는 옥수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옥수수는 멕시코의 테우칸(Tehucan) 계곡에서 최초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는데, 올멕(Olmec) 문명과 마야(Maya)문명에서 본격적으로 경작 기술이 발전하였으며 지금부터 약 4500년 전 무렵부터 여타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종류의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문명들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단절된 것들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온 거대 아메리카 문명권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 한 예로 마야(Maya)와 아즈텍(Aztec)과 체로키(Cherokee)가 일 년이 260일인 종교 월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체로키 부족의 신화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은 오늘날 뉴멕시코 주 인근 지역에서 번성하던 고대 아나사지(Anasazi)문명에서 왔다고 한다. 올멕(Olmec)문명과 마야(Maya)문명 중앙아메리카(Mesoamerica)에서 처음 발생한 주요 문명은 올멕 문명이다. 올맥은 멕시코 만에 가까운 지역에서 BC1500년경부터 BC300년 무렵까지 번성하였는데, 이들이 살았던 지역은 홍수가 자주 발생하는 까닭에 농업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따라서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다른 지역에서 들여오고 또 자신들의 생산물을 파는 무역에 주로 종사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다른 민족에게 전하기도 했다. 올멕 문명은 천문학, 역법, 종교, 건축, 조형예술 등이 고도로 발달하여 올멕 문명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올멕 문명을 메소아메리카문명의 원조라 부른다. 특히 이들은 세계최초의 문자중의 하나인 올멕문자를 만들어냈다. 올멕 문명의 뒤를 잇는 새로운 문명으로 마야 문명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수 세기 전부터 마야인들은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명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명으로 발전시키면서 지금 멕시코와 과테말라와 벨리즈가 있는 유카탄반도 일대에 마야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기원후 5세기경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0세기경에 이르려 식량부족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마야 문명은 가장 뛰어난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야 족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위도와 경도의 개념, 일식과 월식 그리고 금성을 포함한 행성들의 이동 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마야의 달력은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여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역법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마야인들은 영(0)의 개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마야 문명의 우수성은 특히 Tical과 Chichen Itza 등 여러 도시에 걸쳐 건설된 피라미드와 신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문명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쯤 가면 거대한 고대 유적지 테오티우아칸에 도착한다.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중심부에는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 있다. 최전성기 때의 테오티우아칸에는 15만 이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대 도시는 기원전 100년경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후 250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500년경에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7~8세기 무렵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도시를 어떤 민족이 건설하였으며 또 왜 멸망하였고 패망 후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등에 관하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1세기경에 아즈텍(Aztec) 문명의 주역이 된 톨텍(Toltec)족이 테오티우아칸을 발견했을 때에는 벌써 폐허 상태였는데 그들은 이 도시를 자신들의 묘지로 사용하였다. 톨텍(Toltec)문명 톨텍족들은 8세기경에 테오티우아칸이 몰락하자 멕시코 밸리(Mexico Valley)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멕시코 중부를 지배했으며 수도를 툴라(Tula)로 정했는데, 툴라는 중앙아메리카 민족이 세운 도시로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12세기에 들어 기상재해 등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을 무렵 북방 수렵민족의 침입으로 톨텍문명도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톨텍족 중 일부는 멕시코 밸리에 있는 텍스코코(Texcoco) 호수 주변으로 옮겨갔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후일 아즈텍문명을 일구게 된다. 톨텍 문명은 역법, 천문학,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마야 문명을 많이 닮아 있었다. 아즈텍 문명 톨텍족들이 12세기 북쪽의 수도 툴라에서 텍스코코 호반으로 옮겨올 무렵 멕시코 지역에 다른 많은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했던 세력은 텍스코코(Texcoco)와 틀란코판(Tlacopan)이었다. 한편 13세기부터 북멕시코에서 이동해온 수렵민족인 아즈텍(Aztec)족이 1325년에 텍스코코호의 작은 섬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테노치티틀란(Teno- chtitlan)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아즈텍 대신 멕시카(Mexica)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멕시카는 점차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해 나갔는데 1428년에는 텍스코코와 틀란코판과 더불어 3자간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군사동맹으로 더욱 강력해진 이들 도시국가들은 멕시코 밸리를 포함한 중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까지도 점령하여 이른바 아즈텍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멕시카가 나머지 두 동맹국마저 제압하여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아즈텍제국은 정복한 도시들을 직접 통치하는 대신 조공을 받는 형식으로 간접적인 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즈텍문명은 1520년 갑자기 나타난 스페인의 코르테스(Cortez)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아즈텍 족은 수렵민 출신이어서 문화수준이 낮았다. 그들은 주변의 여러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 왔다. 특히 톨텍족 유민들이 건설한 텍스코코로부터 역법, 천문학, 종교 등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아즈텍 문명에는 독특한 인신공양제도가 있었다. 전쟁으로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살아있는 사람의 가슴을 절개하여 심장을 꺼내고 살아있는 심장을 신을 위한 제물로 바쳤는데 1년에 약 2만 명의 포로가 제물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독자기고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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