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의 세상 스케치 493회 |
보스톤코리아 2015-04-13, 11:49:47 |
몇 날 며칠 밤을 세워가며 붓글씨를 쓰던 때가 있었다. 벌써 15년 전의 얘기니 이제는 시간이 아니 세월이 훌쩍 지난 일이 되었다. 어려서도 서예 시간이면 다른 아이들보다 붓글씨 쓰는 시간을 좋아했다. 물론 어린 마음에 선생님의 칭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 칭찬을 듣고 싶어서 말이다. 공부를 잘해서 우등상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그림을 그려 사생대회가 있을 때는 상을 받아보았으니 내게는 적지 않은 나의 좋은 추억거리이기도 하다. 또한, 붓글씨 작품을 교실 뒤에 게시판에 걸어 놓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 부분만큼은 자랑이라 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게다. 세 아이가 한 살, 두 살, 세 살 연년생으로 올망졸망 자랄 때는 정말 가슴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다른 이의 눈에 비치기에는 똑똑한 남편에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세 아이 잘 챙기고 아내 잘 챙기는 그런 가정에서 무슨 투정이냐고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세 아이를 키우며 답답했던 속을 그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내내 가슴 속만 타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며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어쩔까, 이렇듯 지나고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아는 이 어리석음을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어려서도 늦은 밤이면 세 아이를 잠재워놓고 남편이 잠든 시간이면 아래층에 내려와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그리고 가끔 끄적끄적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을 달랬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15여 년 전 시 아주버님과 가깝게 지내시던 지인께서 한국의 한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시면서 시인이셨고 사모님께서는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붓글씨를 좋아하셨던 분이셨다. 이렇듯 인연이란 흘러 흘러서 만나게 되는가 싶다. 그렇게 끄적거렸던 글(졸시)을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이런저런 얘기도 듣고 사모님께는 다른 서체들의 붓글씨 공부를 더 하게 되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이렇듯 붓글씨는 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거나 예술혼의 불가슴으로 누르기 힘들 때마다 가라앉혀주고 눌러주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밤마다 그 먹향이 좋아서 밤을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면서 얼른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고 싶어 붓에 먹물을 적셔 얹으면 글씨는 제 멋대로 퍼져나가 엉망이길 얼마였는지 모른다. 그때 진정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면 기다림을 배운 것일 게다. 제대로의 제 몫을 하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분명 필요하다는 이치를 처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그 깨달음이 나의 삶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붓글씨란, 어찌 보면 그 무엇보다도 깊은 묵상의 세계로 안내한다는 생각을 한다. 먼저 마음의 고요로부터 시작하니 좋고 그 고요는 정성의 마음을 부르는 까닭이다. 그 정성의 마음과 몸으로 벼루에 맑은 물을 붓고 먹 자루를 세워 1시간여 시간이 다 되도록 갈아야 제대로 된 먹물을 만나는 것이다. 어찌 보채는 마음을 버리지 않겠으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처음에는 조바심으로 몇 번을 화선지에 붓을 대었다가 낭배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기다림의 이치를 만나니 마음의 고요가 시작되고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붓글씨는 기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든 빠르지 않으면 느린 것이고 뒤 쳐진 것이라는 생각에 어찌 보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바쁘게 걷고 뛰며 살수록 잠깐의 쉼이 필요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진정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붓글씨는 이렇듯 잠들었던 오감(五感)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다. 무엇인가 마음이 흐트러져 있을 때 마음과 몸과 정신을 통일해주는 그런 힘(에너지)이 있다. 바쁜 시간 속에서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기도와 같고 명상과 같은 것이 붓글씨가 아닐까 싶다. 무엇인가 잘 쓰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굳이 남에게 보여줄 그 무엇도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더욱 좋을 일이다. 무엇인가 시작하기 전의 첫 마음을 일러주고 오롯한 한마음의 정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렇게 먹을 갈면서 퍼져 흐르는 먹향에 닿고 하얀 화선지를 펴놓으며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끗한 화선지에 붓에 적신 먹물을 얹어 놓을 때의 그 마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간 기도인 것이다. 이렇듯 붓글씨는 빠르고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깐의 쉼을 주고 여유를 일러주는 그런 명상은 아닐까 한다. 다시 붓글씨를 시작하며.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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