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65
보스톤코리아  2015-01-26, 12:41:21 
최홍희崔泓熙 장군의 오도관吾道館에는 남태희를 비롯하여 백준기, 한차교,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은 손덕성, 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수련생들을 지도하며  관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는 최홍희가 청도관 명예관장으로 재직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후문이다. 

오도관은 최홍희가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낸 1955년을 기점으로 순풍에 돗단 듯 발전을 거듭했다. 최홍희는 태권도를 전군全軍에 보급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당수도 도장 간판을 태권도 도장으로 바꾸고 태권도를 수련하는 장병들이 경례를 할 때는 ‘태권’이란 구호를 외치도록 하였다.

특히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오도관은 민간도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태권도 교관단 파견은 1962년 12월 남태희를 단장으로 김승규, 정영휘, 추교일 등 4명이 파견된 이래 1973년 3월 12일 철수할 때까지 657명의 유단자를 파견했다. 역대 태권도 교관단장은 남태희, 백준기, 최동희, 김석규, 고재천, 김봉식, 정병길, 김승규 등 청도관 출신이 그 축軸을 이루었다. 

그러나 오도관은 태권도를 수련하고 입대한 유단자 사병들 중에서 청도관 단증만 인정하고 나머지 단은 ‘민간단’이라고 하면서 별도로 승단심사를 해서 인정하였다. 결과적으로 5대 문파를 비롯한 여러 민간 도장들과의 첨예한 대립을 유발하였다. 이에 대해 최홍희는 후일 해명하기를 “오도관이 ‘형제관’이라 할 수 있는 청도관과의 잦은 교류로 기본동작과 형型(품새)의 수련체계가 같았으나 무덕관, 지도관 등의 민간도장의 수련체계와는 달라 군軍에 맞는 별도의 심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우리나라 안에서는 급격히 퇴조하였다. 그 후 현종명, 곽병오, 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으며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다음에는 강덕원講德院에 대하여 살펴 본다. 강덕원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수선한 시기인 1956년에 YMCA 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와 박철희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가 맡았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 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이에 대해 강덕원 2대 관장을 역임한 박철희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조직이 흩어졌을 때 YMCA 권법부라는 본 줄기에서 창무관이 먼저 가지를 뻗은 것이고, 그 후 강덕원이 가지를 뻗은 것이기 때문에 엄연히 말해 창무관의 분관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라고 주장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익힐 ‘강講’에 큰 ‘덕德’자를 써서 ‘덕을 가르치고 익히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1950년대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 역임)과 후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크게 도약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해 정화, 이정후, 이강희, 한정일, 김병수, 지승원, 임복진 등이었다.

강덕원은 이후 창신동-청진동-서대문-서울운동장-서대문로터리 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이 3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하였다. 현재는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다음은 한무관韓武館에 대하여 알아 보자.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19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조선연무관 관장이었던 전상섭이 한국전쟁 때 납북된 후 조직체계가 흐트러지면서 이종우가 지도관을, 이교윤 자신은 한무관을 개관했다고 한다. 따라서 한무관의 뿌리는 지도관이 아니라 조선연무관이라는게 이교윤의 주장이다. 

당시 한국체육관은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었다. 이 체육관의 부관장이었던 이상묵의 허락을 받아 한국체육관에서 임시방편으로 태권도(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00명 이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종우와의 갈등이 증폭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당분간 태권도 지도를 중단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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