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58 |
보스톤코리아 2014-12-01, 10:11:37 |
구한말 국세가 기울어 지면서 우리는 외교와 국방만 잃은 것이 아니라 민족의 얼과 정신문화도 함께 침식당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무예는 고도로 단련된 불굴정신과 높은 기상으로 잘 숙련되었기에 최정예 군사력의 원천인 관계로 철저한 말살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외세에 의해 뿌리가 잘려 나가기 전에 우리 무예의 지엽은 스스로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과 함께 그 모습을 나타내는 무예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무예의 힘이 곧 왕국을 지탱하는 권력의 원천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국체國體를 보존하는 방패가 되었고, 백성들의 유희로도 친숙하게 그들과 함께 숨쉬며 발전하였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는 맨손 무예인 수박도와 함께 마상무예가 절정을 이루어 무술武術 뿐만 아니라 병술兵術과 병합되어 삶이 무술이며 무예가 일상이었다. 조선시대로 들어 오면서 초기에는 강력한 무력으로 대마도 왜구와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국방의 임무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무인들을 적절히 등용하여 문무의 균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점차 유교儒敎문화가 사회전반에 깊숙히 스며들어 뿌리를 내리면서 성리학性理學95) 의 많은 영향은 문치중심의 치세로 바뀌었고 자연히 무예의 가치는 경시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즉 유교적 체계를 갖춘 관료중심의 나라로 주자가례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규범이 되었고, 충효사상이 강조된 선비사회는 경서 읽기에만 몰두하였으며, 무예를 비롯하여 무희, 유희 등의 모든 육체적인 활동을 멀리하면서 소위 ‘문약의 나라’로 전락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무예를 천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무예는 자연히 평민들이나 천민들이 많이 수련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무예가 많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군사력의 약화로 외세의 침략이 잦아지면서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쟁을 초래하였다. 그 후 무예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무예제보’ 등의 무예서를 편찬하여 병사들을 훈련하였다. 이 ‘무예제보’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무예서이다. 그런 와중에서 곧이어 북쪽으로 부터의 침략인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막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정조대에 와서는 무예서의 결정판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여 관군을 훈련시킴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많이 전파되어 무예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임진왜란 부터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이나 일본의 무예들이 조선의 무술 발전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고유 무예는 태견, 각희, 권법, 수박 등의 이름으로 더욱 발전을 하였다. 즉 수박은 몇 가지의 무예를 대표하는 일반명사로 쓰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때부터 있어온 수박을 비롯한 몇 종류의 무예가 조선으로 넘어 오면서도 그 가치가 중요히 인정되어 계속 수련되었다. 화포의 발명과 사병폐지로 군사적인 무술의 필요성은 줄어들었지만 무예의 필요성은 왕이나 왕족들의 근접경호 특성상 탁월한 기량을 가진 무인들을 필요로 했다. 왕조실록을 좀더 자세히 보면 세조대(세조13년, 1467년)를 들어 오면서 수박이란 기록이 보이질 않는다. 이는 수박, 즉 무예가 없어졌다기 보다는 다른 명칭이나 또는 문치중심으로 바뀌면서 왕조실록에 기록을 소홀히 한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조대에서 갑사나 방패를 선발할 때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무예의 능력에 따라 선발하였다. 즉, 무예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수련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권법’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선조 32년(1599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중국의 무술을 지칭하는 용어였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말처럼 쓰였고 당시에는 무예의 일반용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점은 세조대에서 선조대까지 ‘수박’이라는 무예가 실록의 기록에 없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전통무예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전통무예, 그것도 왕의 근접 경호부터 일반백성들이 두루 수련하던 무예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기와 병술의 발달로 인한 전장에서 실용성이 줄어 들었고, 성리학 이념으로 문약을 낳은 관료들의 문치중심이 무예를 잠시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시켰을 뿐이다. 95) 유교의 주류 학파로 12세기에 남송의 주희(주자)가 창시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14세기에 안향에 의해서 들어왔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국가의 통치이념이 되었고, 16세기에 동인의 이념적 기반이 된 이황의 퇴계학파와 서인의 이념적 기반이 된 이이의 율곡학파가 형성되면서 붕당의 정치는 도를 더했다. 실학은 퇴계학파의 분파인 남인(시파)과 율곡학파의 분파인 노론(북학파, 벽파)에서 나왔다. 삼국시대 부터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면서 지배한 이념이 조선에서는 건국과 통치이념이 되었고, 16,7세기에 꽃을 피웠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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