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객설閑談客說: 머물고 싶던 순간들
보스톤코리아  2014-11-24, 12:49:48 
추위를 먹었다. 더위 먹는다는 말은 있는데, 추위를 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입에 담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올해는 추위를 먹었다. 목이 칼칼해지고, 으실으실 몸이 떨렸다. 오한이 생기면서 진땀까지 스멀스멀 비어져 나왔다. 감기인게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리는데, 가을 감기에 잡혔던 거다. 윤9월이라 그런가. 감기는 오래 갔다.

감기 조심하세요. 판피린 에프. 

  운전 중이었다. 개성삼절開城三絶이 뭐더라? 고 스스로 물었다. 박연폭포와 황진이 일텐데. 유학자 한 분 이름을 떠서 올릴 수 없었다. 입안에서도 머릿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거다. 아직 인터넷이건, 뭐건 없던 시절이다. 위키니 네이버도 당연히 없다. 그렇다고 한국에 전화해서 그가 누구더냐고 묻기에는 뜬금없고 황당하다. 한동안 잊고 었는데, 이따금 질문이 다시 되살아 났다. 잊을만 하면 다시 생각나는 거다. 몇 년인가 흘렀다. 이름이 생각났다. 화담 서경덕. 

  손에 가시는 뽑아내지 않으면 성가시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닌 것이, 걸릴 적마다 짜증스러운 게다. 다시 운전 중이었다. 그게 누구더라? ‘머물고 싶던 순간들’을 쓴 작가. 제목은 생각나는데, 작가 이름을 기억할수 없었다. 입안에서도 슬금슬금 도는데, 온전한 이름이 되어 나오지 않았던 게다. 박모였는데. 끊임없이 이름을 붙여 봤다. 행여 이름자가 튀어 나올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엉 아니었다. 손가락에 가시를 뽑아 내기로 했다. 이번엔 인터넷에서 손쉽게 찾았다. 박계형.

  간지러운 이야기에 가슴설레던 야릇한 시기였다. 학급 교실에 그 책이 돌아다녔다. 앞뒷장이 떨어져 나갔는데, 너무 많은 대본貸本손님을 거쳤다. 어렵게 내 차례가 되었다.  그저그런 범생이었으니, 당연히 순서도 늦다. 늦됨을 보상받을 요량이었으니 단숨에 읽었다.

그렇다고 저녁까지 굶지는 않았는데, 금서襟書로 낙인찍힌 그 책을 숨어서 보는건 짜릿했다. 다락 속에 들어가 읽었던 기억이다. 다락은 나만의 숨는 공간이었다. 다락속은 어두웠지만, 그런대로 안락했다. 읽고 난 밤 잠자리에 누웠다. 천정벽지 사방무늬가 어둠 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주인공 연희가 나오고, 별빛이 우물가로 소슬히 내렸다. (주인공 이름이 연희인건 내 기억이다. 인터넷에서도 여주인공 이름을 찾을 수없었다.) 연희의 뒷모습에 아직 봄 햇빛 냄새가 났던가. 그 날은 봄날 밤이었을 게다. 지금은 내용을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제목도 틀렸다. ‘머물고 싶었던 순간들’이란다. 하지만 ‘머물고 싶던 순간들’. 이 말이 더 명징하지 않은가. 

  내게 더 머물고 싶던 세월이 있던가. 아내에게는 머물고 싶던 시간이 있을겐가. 나와 함께한 시간들이 오래 머물고 싶던 시간일까. 나 혼자 오해하고 있다. 아내도 단발머리 여학생시절을 거쳤을 텐데, 무슨 책으로 그 시절을 넘어왔나. 내가 뭐 그렇다고 데미안이니, 그런 책은 읽지 않았다. 홍의소녀紅衣少女가 나오는 무협소설은 몇 권 읽었다. 정협지니 뭐 그런 류의 책이다. 아내가 말할지도 모른다. ‘수준하고는, 쯧쯧’  

  내 아이는 무엇으로  힘겨운 사춘기를 넘어가고 있는가. 누구라도 그러하듯, 당신도 오래도록 머물고 싶던 시간들이 있으신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로마서 11:22)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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