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이어온 김씨와 허씨의 우정 |
보스톤코리아 2014-11-10, 11:59:47 |
지난 컬럼에서 한선제(漢宣帝)가 허광한(許廣漢)의 딸 허평군(許平君)을 취해 효선황후(孝宣皇后)를 삼았는데 곽광의 처 현아가 이를 시기해서 효선황후를 독살했고 이들의 죄상을 허광한과 김일제의 조카 김안상(金安上)이 밝혀 내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곽씨 일가의 전횡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왕씨, 김씨, 허씨가 바로 그들이다.
김안상은 도성후(都成侯)로 그 아들 김창은 허평군 소생인 유석(후일의 원제: 元帝)의 스승이 되었고 김일제의 현손 김흠(金欽), 김준(金遵)은 제후로 봉해지고 구경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허광한 허씨(許氏) 집안은 독살당한 허평군 공애황후에 이어 한성제(漢成帝)에게 허가(許嘉)의 딸이 간택되었다. 이처럼 김씨, 허씨 집안은 한나라 조정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중요한 사실은 이들 두 집안이 공동의 목표를 두고 힘을 합쳐 왔다는 것이다. 한선제 때 김안상과 허광한이 연합하여 곽씨 세력에 대항한 것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역사학자 문정창 씨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김륜의 5대손, 김안상의 4대손, 김창의 3대손 김탕(金湯)이 왕망의 신(新)나라가 망한 다음에 김해 지방으로 도피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수로 왕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김수로 왕의 왕후는 성이 허(許)씨인 허황옥이다. 여기서 우리는 허황옥 왕비의 출자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허광한, 김안상 양가에서 이미 김수로 왕과 허황후를 맺어주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삼국유가에 기록된 “가락국기”에서 두 사람의 결혼이 이미 계획되어 있었고, 허황후가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가락국기” 시작이 아래와 같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그리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 18년(AD42)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2~300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 소리가 들리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9간들이 대답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냐?” “구지입니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라 하면서 춤을 추어라”면서 가락국기가 시작된다. 이곳에 나타난 주인공(김수로 왕)은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협박하면서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구지봉이 어디냐고 묻고 있으니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다.
금관가야를 건국하고 6년 뒤인 AD48년에 9간들이 건의하기를 자신들의 딸 중에서 제일 예쁜 처녀를 골라 짝을 삼으라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으로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며 거절하고는 유천간에게 명해서 배와 말을 준비하여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즉 김수로 왕은 허황후가 언제 도착할 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허황후가 인도에서 출발했다면 그녀의 도착이 언제라는 것을 짐작 못했을 것이다. 허황후는 김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했을 것이고 그 사실을 벌써 알고 있어서 유천간을 내보낸 것이다. 허황후를 수행한 두 사람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으로 이름과 벼슬이 중국 이름이고, 가지고 온 선물도 금수능라, 의상필단, 금은주옥, 한사잡물(漢肆雜物)로 모두 중국에서 나는 귀중품이라서 허황후가 중국 어디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특히 ‘한사잡물’은 한나라에서 생산되는 여러 물건들이라는 뜻이니 허황후가 떠난 지역이 중국이나 중국인근이라고 추청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허황후가 도착한 후 이틀 후에 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만약 이들이 인도에서 왔다면 먼 항해를 끝내고 고작 2일만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이들이 가까운 중국 근처에서 왔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그렇다면 허황후가 허광한(許廣漢), 김안상(金安上)과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꽤 있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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