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의 뿌리(14)> |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6:44:37 |
한무제의 신하들 중국 사람들은 역대 황제 중에서 5명의 명군(名君)을 꼽고 있다. 진시황제, 한무제, 당태종, 강희제, 건륭제가 다섯 황제인데 이 중에서 3명을 뽑으라면 진시황, 한무제, 강희제를 선택하고 최고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한무제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가면서까지 굴욕적인 화친을 강요당했던 한나라가 그의 52년 치세 때에 흉노와 40년에 걸친 전쟁에 승리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중국 천년 사직의 입지를 다져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치세 때에 한나라의 영토가 제일 넓었고, 그의 치세 때에 실크로드를 통해 비로서 서역과 중국간의 교류가 시작되어 서역과 페르시아, 로마에 중국이 알려지게 되었다. 보편적인 잣대로 평가하면 그는 분명히 중국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의 백성, 신하들이 치른 희생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중국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목숨을 내걸고 흉노와 싸워 공을 세운 장군 이광, 이릉, 위청, 이광리는 가족까지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숙청되었다. 그는 죽을 임시에 “집은 황제가 된 후 분별없고 도리에 어긋하는 일을 많이 하여 천하에 근심을 더해 주었다. 오늘부터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일은 모두 중단하겠다”는 말로 백성들에게 사과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가 하는 말이 선해진다”는 말은 한무제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어찌되었든 한무제는 중국인들에게는 명군으로 추앙 받고 있는 영웅임에 틀림없다. 영웅의 등장에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한무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고(班固), 반소(班昭) 남매가 저술한 전한서(前漢書)에는 전한(前漢: 東漢)(BC202-AD23) 때 활약한 48명 인물들에 대한 열전(列傳)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48명 중 13명이 한고조 유방의 신하였고 23명이 한무제 유철의 신하들이었다는 사실은 한무제가 인재를 발탁하는데 특출한 노하우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귀천이나 신분, 종족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등용하였다. 예를 들면 흉노를 무찌르는데 결정적 수훈을 세운 위청, 곽거병은 미천한 계급 출신들이었다. 김일제의 경우는 흉노인이었지만 노예의 신분에서 발탁하여 황제 다음가는 2인자의 지위까지 수직 상승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한무제는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흉노와의 40년 전쟁에서 그는 한번도 황궁을 나와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는 흉노를 대적할 장수들을 선택할 따름이었고, 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어느 시대의 풍습이나 사회를 이해하려면 역사서를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역사서 중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년, 월, 일 순으로 기록한 연대기(年代記)보다는 제왕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와 신하와 인물들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읽을 것을 권장하였다. 사마천의 권유에 따라 사기와 한서(漢書)에 기록된 한무제 시대의 신하 중 흉노와 관계된 몇 사람과 동중서, 장건열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동중서(董仲舒) 그는 한문제, 무제에 이르는 시기에 유학의 대가였다. 그는 천인 삼책(天人三策)이란 상주문을 무제에게 올려 군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적하여 주었다. 3책의 첫 번째는 천인감응(天人感應)으로 옮은 마음으로 일하면 하늘도 응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군권신수(君權神授)는 군주의 권력은 하늘이 내리신 것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천견론(天譴論)으로 군주가 잘못하면 하늘이 꾸짖는다는 것이다. 동중서의 천인삼책은 한무제 뿐만 아니라 후세에 이르기까지 군왕들이 지켜야 할 통치철학의 기본이 되었다. 둥중서는 한무제의 스승으로, 그가 은퇴한 후에는 의논할만한 큰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 동중서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스승이기도 했다. 2) 서역으로 가는 Silk Road를 개척한 장건(張騫) 한나라 때 옥문관(玉門關), 양관(陽關: 지금의 감숙성 돈황) 서쪽에 있는 광활한 땅, 즉 지금의 신장과 중앙 아시아 일대는 서역(西域)이라고 불렀다. 그곳에는 36개나 되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흉노의 통제 하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로써 흉노의 경제력이 강화되니 흉노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한무제는 흉노로부터 서역을 떼어 놓을 방책에 골몰하게 되었다. 마침 서역에 있는 대월지(大月氏)국이 흉노의 노상 선우(老上單于)에게 패하고 국왕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노상선우가 대월지 왕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하는 야만적인 행패를 저질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대월지 왕이 흉노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합쳐 흉노를 쳐부술 동맹국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대월지국에 갈 사신으로 뽑힌 사람이 장건이었다. BC138년 장건은 흉노사람 감부(甘父)의 길 안내를 받으며 100여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출발하였지만 흉노 영내에 들어서자마자 붙잡혀 구금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러갔고, 흉노는 장건을 회유하려고 장건에게 아내를 주고 득남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건은 대월지국에 가려는 뜻을 굽히지 않고 탈출하여 대월지국에 마침내 도착하였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에 대월지국의 사정이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그들은 더 이상 흉노와 싸울 필요가 없어졌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장건이 돌아올 때는 흉노족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피해 남쪽 길을 택했으니 지금 신장의 야르칸트, 호탄, 콰킬릭을 거쳐 강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들어가다 다시 흉노에게 잡혀 1년이나 구금되었다. 마침 흉노간에 내란이 있어 아내와 조수 감부를 데리고 도망쳐 장장 13년간의 고행을 끝내고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BC119년에 한무제의 청으로 장건은 기련산, 돈황 일대에 있는 오손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오손에 도착한 후 장건은 부사신들을 대완, 강거, 대월지, 페르시아, 신독(인도) 등에 보내 외교 활동을 펼치게 하였다. 가장 멀리 다녀온 사자는 로마제국과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렀다.
장건은 귀국한 후에 세상을 떠났지만(BC114) 장건이 개척한 길을 통해 중국의 사신들은 1년에도 10여 차례씩 서역을 다녀오게 되었다. 포도와 개자리, 석류, 호두, 참깨, 후추, 오이, 마늘 등은 장건이나 사자들이 서역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물론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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