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47 |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4:34:10 |
2014-09-05 백동수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전설적인 무예가이다. 백동수 또한,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박제가나 이덕무와 같이 서얼이다. 백동수의 경우를 보면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얼마나 적자를 중시하고 서자를 차별했는지 그 사회상을 볼 수 있다. 한 번 서자는 영원한 서얼이었다. 그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후손들이 받아야 했던 냉대와 멸시 그리고 차별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박제가는 어머니가 첩이였기에 자신이 서자였다. 이덕무는 아버지 이성호가 할아버지 이필익의 서자인 관계로 서얼이었다. 물론 그의 10대조인 정종의 아들 무림군이 후궁에서 출생한 서자였지만 왕자인 관계로 그의 적자들은 서얼 신분은 아니었다. 이덕무는 아버지가 서자인 관계로 서얼이 된 것이다. 백동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신임사화71)에 연루되어 죽은 백시구가 그의 증조부이다. 그의 조부는 백상화이고, 아버지는 백사괭이다. 조부인 백상화가 서자인 관계로 백동수는 신분상 서얼에 속했다. 그리고 손위 누이가 이덕무에게 출가하였기에 이덕무의 처남이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함에 있어서 백동수는 실기實技를 담당하였다. 그는 청년시절 학문을 멀리하고 무예에만 심취하였기에 주위 사람들이 심히 그를 우려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주위에는 박지원, 이덕무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으며 중년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그의 친구들과 당대의 대학자들로 부터 ‘무武에서 문文을 일구었다’는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는 1743년에 태어나서 1816년에 졸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가는 검객 김광택72)의 제자로 조선검법을 전수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김광택을 ‘검선劍仙’이라고 불렀다. 김광택은 김체건의 아들이며, 김체건은 우리나라 무예가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백동수는 영조 47년(1771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와 그간 적체되어온 만과萬科73) 로 인하여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강원도 산골에 가서 10여년간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을 산골에서 보내다가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용영을 설치할 때 창검의 일인자로서 궁궐로 돌아 왔고, 그 후 집춘영, 어영청, 장용영 초관哨官를 지내고 1789년에 정조의 명에 따라 박제가, 이덕무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간행하였다. 그 후 백동수는 여러 무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딴 세상을 노니는 사람’(청정관전서 – 이덕무 저)같이 살다가1816년 74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그의 전설적인 무예의 신기를 다룬 책과 드라마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후예들을 들뜨게 만들고 무도수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71) 신임사화는 경종 때 신축년(1721년, 경종 즉위년)에서 이듬해 임인년(1722년)에 걸쳐 일어났던 소론이 노론들을 처형한 옥사 사건이다. 경종이 후사가 없는 관계로 이복 동생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정쟁으로, 1721년에 일어난 신축옥사는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아들이 없어서 노론들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고 주장하여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경종이 병고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경종은 허락하였지만 소론의 조태구 등이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취소되었다. 소론들은 이 발상을 불충으로 몰았고, 목효룡의 고변사건으로 대리청정을 주장한 4대신인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이 사형당한 사건이다. 이듬해 임인년 3월에 목효룡, 김일경 등이 임금을 시해하려는 역모사건이 있다고 고하면서 국청이 열렸고, 정인중, 김용택, 이천기, 백망, 심상길, 이희지, 김성행 등 60여명의 노론들이 잡혀들어 왔다. 심문은 물론 소론이 담당하였고 잡혀온 노론의 대부분은 죽임을 면치 못했고, 이 사건에서 백동수의 증조부 백시구도 사형 당했다. 삼대구족을 멸한다는 역모사건에서 살아난 그의 조부 백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자’였기에 화를 면했지 않았을까! 72) 김광택(金光澤, 생몰년 미상)은 숙종 때의 무인인 김체건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종의 신분이었으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관비로 되어 있다. 그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연잉군 때 영조를 시종했으며, 그 후에는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부친, 정조의 외조부)의 사저에서 시종했다. 그의 정식 이름은 국표國標였고(아명은 노미老味), 광택이란 이름은 영조가 하사한 것이다. 그는 부친 김체건으로 부터 무예와 검법을 전수받았다. 무예 뿐만 아니라 문장과 서예도 함께 전수받았다. 영조가 그에게 글을 쓰게 한 기록으로 볼 때 그의 서예실력 또한 무예 못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친 김체건 역시 당대의 문장가요 서예가였다. 그리고 김체건은 우리나라 무예가의 시조로 꼽힌다. 백동수는 조선 제일의 검객 김광택으로부터 조선검법을 전수받았다. 김광택은 영조 초기 그의 신기의 검술을 백동수에게만 전하고 홀연히 사라져서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 73) 만과는 과거시험, 특히 무과를 자주 시행하여 많은 합격자를 양산함에 따라 관직이 부족하여 합격한 자들이 임용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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