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 버 (Aaron Bur)는 왜? (2) |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0:49:18 |
2014-07-25 (지난 주에 이어) 1782년 이후 뉴욕 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아론 버는,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초대 정부가 출범한 1789년 뉴욕 검찰 총장에 임명되었다. 그 해, 훗날 아론 버와 결투를 벌이게 되는 알렉산더 해밀튼은 조지 워싱턴 내각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고 아론 버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1772년 뉴욕으로 이주한 알렉산더 해밀튼은 킹스 칼리지 (현재의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해밀튼의 영재성을 알아보고 처음 후원자가 휴 낙스 (Hugh Knox) 목사등은 해밀튼을 장로교 정신에 입학하여 설립된 프린스턴 입학시키고 싶어했으나, 당시 프린스턴 총장인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이 해밀튼의 입학을 거절하면서, 해밀튼은 본의 아니게 영국 국교회 (Anglican Church)의 종교적 뿌리가 있는 킹스 칼리지에 이를테면 특례 입학 (special student) 위치로 다니게 되었고, 정식 입학 허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세월도 하 수상했던 1774년 가을 학기에야 이루어졌다. 게다가 ‘서인도 제도 출신’의 특례 학생 해밀튼은 킹스칼리지 캠퍼스 내에서 어딘지 이질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뉴욕으로의 이주, 킹스 칼리지에서의 학업 그리고, 미국의 독립 전쟁은 해밀튼에게 여러 모로 ‘인생 역전’의 교두보가 되었다. 시기적으로 봤을 때 해밀튼이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한 기간이 길진 않지만, 독립 전쟁 발발 전후라는 특수한 요인이 해밀튼을 빛나게 했다는 이야기다. 해밀튼은 독립 혁명을 지지하는 편에 섰는데, 당시 킹스 칼리지 내에서 혁명 지지 세력은 존 제이 (John Jay) 로버트 리빙스턴 (Robert Livingston)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해밀튼의 유려한 글솜씨로 작성된 영국 왕실 충성파 (Loyalists)들의 입장에 맞선 정치 팜플렛은 그의 특출난 지적 재능과 분석, 논리, 문장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한편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과 프랑스 간의 긴밀한 공조가 관건이 되었는데, 덕분에 불어에 능통했던 해밀튼은 조지 워싱턴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 ‘프랑스통’을 꼽으라면 토마스 제퍼슨이나 벤자민 프랭클린이 언급되지만, 불어의 숨은 실력자는 프랑스 위그노 출신 어머니를 둔 해밀튼이었다. 그의 명석한 판단력과 지적 능력은 사실 조지 워싱턴의 참모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이었다. 어느 샌가 ‘서인도 제도 출신의 법적으로 사생아’였던 해밀튼은 신생 미국의 핵심 인물로 부각하고 있었다. 급기야 매우 부유했던 상인이자 뉴욕 최고의 명문가문의 필립 스카일러 (Philip Schuyler)가 해밀튼을 탐냈다. 1780년, 해밀튼은 필립 스카일러의 딸 엘리자베스와 부부의 연을 맺게된다. 해밀튼은 그렇게 상류사회로 진입했다. 미국 독립 전쟁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의회로 진출한 해밀튼은, 이후 건국의 과정에서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며, 제헌의회 (Constitutional Convention)를 소집한 핵심인물이자 연방주의자 (Federalists)의 이데올로그로 활약했다. 헌법 비준과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반연방주의자 (Anti-Federalists)들을 설득하기 위해 존 제이,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Pubulius 라는 필명으로 저술한 Federalist Paper 85편 중 절반 이상은 해밀튼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해밀튼의 ‘연방주의’에 대한 확신과 선전이 단지 각 주의 ‘연맹’을 통한 단일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미국의 재정정책의 근간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해밀튼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연방은행, 위스키에 대한 과세, 국가 채무 지불 계획 등은 사실 크레딧 제로 상태였던 신생 미국의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중앙 정부 재정을 확충하는데에 주력했다. 그런데 해밀튼이 주장했던 강력한 연방국가를 위한 재정정책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집단은 주로 해밀튼의 장인 스카일러와 같은 북부의 상인 등 부유층이었기때문이다. 이때문에 제퍼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해밀튼과 대립각을 세웠고, 결국 1790년대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경제적 이익에 기반한 정당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론 버는 왜?”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아론 버와 해밀튼은 어쩌다가 ‘결투’로 끝이 날 만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까? 그것도 당대 가장 머리좋다고 정평났던 두 사람이! 혹은 왜 1800년 선거 당시 해밀튼은 지금껏 초지일관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자 정 반대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서로 상반되는 지역-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졌던 제퍼슨이 당선되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되고, 이를 통해 결국 버의 미움을 사게 될까? 아론 버의 소속 정당은 해밀튼의 연방당이 아니라 민주공화당쪽이었다. 물론 이들은 정치적 ‘이념’때문에 맞섰다기보다는 공동의 지역구 뉴욕에서의 ‘이해’가 충돌했기 때문에 갈등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가령, 해밀튼의 장인 스카일러는 워싱턴 집권 1기에 뉴욕주 초대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는데, 1791년 상원 선거에서는 아론 버에게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장인의 패배 덕에 막강 권력을 가진 것 같던 해밀튼도 적지 않은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음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이어 아론 버가 이끌었던 뉴욕의 “태머니”는 해밀튼에게 경제적으로도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계속)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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