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보수화 보수의 종교화—그리고 1980년대 |
보스톤코리아 2014-06-02, 14:08:31 |
뉴스를 볼 때마다 울컥울컥하게 되는 세월호 트라우마는 내게도 여전하다. 이 트라우마는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복기하게 될 때마다, 수시로 눈가와 가슴께가 동시에 축축하게 뜨거워지는 이 증상을…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을게다. 호모사피엔스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공감의 능력이라니, 당연하지 않은가. 설령,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은 참사의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비교해 발톱의 때의 백만분의 일밖에 되지 못할지언정. 그러니,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핵심인 기독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시는 목사님들이, “좌파, 종북세력이 세월호 참사에 기뻐 날뛴다”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느니, “정몽준 아들 국민 미개 발언 틀린말 아니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라느니,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불국사나 설악산으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한기총 부회장 조광작 목사)고도 하고, “하나님이 …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식으로 망언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고 계신 이 상황에 매우 착잡할 따름이다. 왜 그들은 상처입은 양들을 말없이 포옹하고 위로하지 않을까? 아니,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기독교에 먹칠하는 먹사소리는 안들을텐데. 뭔가를 발언함으로 인해, 결국 신자유주의형 독점을 구축한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은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렇게 몸소 보여주실 필요까지는 없었을터인데말이다. 개인적으로 목사도, 승려도, 신부도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사”를 가지고 그것을 표현할 자유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발언의 효과를 고려하여 성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경우. 1980년대 – 도덕적 다수, 종교적 아, 나는 지금 미국사를 이야기하려던 참이다. 1960-70년대는 미국의 격랑기였다. 흑인 민권운동과, 블랙 파워 운동, 베트남전 반전운동, 페미니즘운동, 게이 권리 운동, 인디언 권리 운동 등,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1920년대의 1차 적색공포와 불관용의 시대적 기준으로 치자면 온간 “비 미국적인 (즉, White Anglo Saxon Protestant가 아닌 모든) 가치들이 목소리를 냈던 때였다. 이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학생 운동세력에게 있어 학교는 기득권의 권력과 획일성을 재생산하는 곳이었던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의 경우 1925년 Scopes Trial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한다는 테네시의 법을 위반한 생물학 교사 스코프스가 기소되어 100불의 벌금을 받았으나, 기독교계가 역으로 조롱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의 역풍으로 보수적 기독교는 영향력을 상실했고, 1960년대를 전후로 해서는 진보적 신학이 훨씬 우세했다. 이렇게 위축되어 있던 보수주의적 기독교는 Engels v. Vitale 판결 (1962) 크게 반발하게 된다. Engels v. Vitale 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강제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 (정확히는 국교의 금지 및 종교의 자유) 에 대해 못박은 수정헌법 제 1조와 배치한다고 판결했다. 보수적 기독교의 부활에 있어 1968년 대통령 선거는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과거 남부는 민주당의 아성이자 표밭이었다. 하지만 민권법은 보수적인 남부백인들이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베트남전의 철군 문제를 둘러싸고도 내홍을 겪고 있던 때. 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닉슨은 바로 남부 백인의 보수적 정서에 크게 어필을 했다. 이후 그는 “조용한 다수”는 보수적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엽에 들어 공화당은 근본주의 기독교의 정서를 자원화하는 데 성공한다. 1972년 여성의 출산 선택권을 확인한 Roe v. Wade 판결 (1972) 이후 공화당은 정당 정책에 앞서 자기당의 보수적인 “색깔과 문화”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민주당=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낙태법을 찬성하는,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비기독교적인 당”의 프레임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980년대 “도덕적 다수” 혹은 “기독교 권리운동”이 이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십 여년 전 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 “이 전쟁은 성경이 정당화하는 전쟁”이라느니, “왜 아랍인들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지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운운하는 목회자들을 만나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공화당이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지지 정당이 되었고, 다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아이덴티티가 사실상 공화당을 통해 변모하는 과정은 현재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지않은 함축을 가진다. 물론, 종교에는 보수적으로 지킬 수 밖에 없는 교리가 있고, 도덕의 준거가 있다. 문제는 종교적 원칙을 지키는 보수적 태도가 기득권을 지키는 보수적 태도와 혼동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종교가 보수화된 끝에, 신이 아니라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종교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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