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30 |
보스톤코리아 2014-04-14, 12:14:09 |
이립과 함께 활약한 또 한 명의 의병장 정봉수鄭鳳壽(1572 ~ 1645, 선조5 ~ 인조23), 그는 약관의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던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무과에 응시하여 스스로 무인이 되어 임금과 나라를 지키기로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을 참고하여 그의 의병 활동을 짚어 본다.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할 때 선전관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그 후 조정과 지방에서 벼슬을 하였다. 1627년, 55세의 나이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용골산성을 지키며 항전하였다. 당시 용골산성에는 철산과 의주 등 타지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이 많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고립된 성에 많은 백성들이 운집해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라고 명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정봉수는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적군과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출신出身(임용이 안된 과거합격자, 특히 무과 합격자를 말한다.) 김종민金宗敏,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 이광립李光立 등을 참모로 하여 의병들을 훈련시켜 정예병으로 양성하였다. 그들이 모집한 의병은 사기 충천한 4,000여명의 장정과 무인武人들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도 정봉수의 지도력을 인정하여 그에게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당상계를 주었다. 그는 지휘력을 발휘해 보기도 전에 참모로 같이 성을 지키기로 한 장사준이 적에게 항복하면서 정봉수에게도 항복할 것을 협박하였으나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48) 그는 배신한 장사준의 목을 먼저 베고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과 후금이 이미 화의를 하였음에도 성에 남아서 계속 항전하였다. 그리고 후금군은 이 지역에 배치 되었던 군사들을 모아 성을 공격하였으나 많은 전사자만 내고 퇴각하였다. 이어 후금의 부장副將 유해劉海(흥조興朝 라고 불리기도 한다)가 직접 출정하여 출성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정봉수는 계속 항전하였다. 결과적으로 후금군은 또 한번 많은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후일 맹약을 어겼다는 구실을 주기도 하였지만49) 조선에도 힘있고 용기있는 인물 있다는 걸 보여준 대전투였다. 이외에도 평산의 이진형, 해주의 유즙, 평양의 조유부와 김지구, 그리고 곽산의 홍천감과 이여각 등의 수 많은 의병장들이 스스로 지역의 의병들을 모아 나라를 지킨 의義와 용勇을 표출한 진정한 무도인의 표본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묘,병자호란의 의병봉기는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에 비해 상당히 미약하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된 원인은 두 전쟁 모두 전쟁 발발 후 비교적 짧은 기일내에 화의나 항복을 했다는데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 파탄으로 인하여 그 연장선에 놓인 사회적 불안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완전히 상실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는데 의분義憤인들 있었겠는가! 48) 승정원일기(인조16권, 5년 – 1627년 4월5일)에 보면 정봉수가 조정에 올린 치계가 실려있다. “미곶첨사 장사준은 부사 이희건이 돌아오지 않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달적의 장수 왕자王子에게 투항하여 아내를 인질로 맡기고 용천부사가 되기를 청하였고, 용천부사가 되어서는 스스로 관곡을 내어 오랑캐를 호궤하는 술을 빚고 백성들의 소를 겁탈하여 오랑캐를 호궤하는 반찬을 만들었으며 백성중에 머리를 깎지 않은 자가 있으면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하되 순종하지 않으면 죽였습니다. …중략… 그 뒤 장사준이 신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협박하였으나 신이 회답도 않자 이튿날 사준이 와서 협박하기를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너에게 화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화 또한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달 수백을 몰래 끌고 와서 성 밖 7리 지점에 숨겨 두었는데, 신이 드디어 사준과 공모자 수십 명을 죽이니 성중의 남녀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라고 실려있다. 여기서 달적과 진달은 후금군을 비하하는 용어이다. 49) 정묘호란으로 맺어진 형제지국의 강화조약을 무시하고 조선은 계속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래서 국호를 청으로 고친 홍타이지(숭덕제)는 친명정책을 쓰는 조선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기근으로 타격을 받고 있는 자국의 경제혼란을 탈피하기 위하여 1636년12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대항하였지만 군사력과 식량 등의 부족으로 결국 두 달 만에 삼전도에 차려진 수항단에서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를 하면서 항복하였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수 많은 대신들과 수십만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조선과 청의 관계(항복한 화약의 내용 1조,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을 행할 것)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이 ‘시모노세키 조약’ 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할 때 까지 약 250년간 지속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많은 외침을 받으며 살아 왔다. 그때마다 그들을 잘 물리치면서 한민족의 혈통을 유지해왔다. 심지어 고려 무신정권하에서 대몽항쟁도 40여년을 하였고, 임진왜란도 7년 동안 하면서 왜적을 격퇴하였지만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만에 오랑캐라고 업신여겨오던 만주족에게 왕이 항복하였다. 그 참을 수 없는 충격적인 굴욕감은 조정은 물론 백성 모두를 공황장애로 몰아 넣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은 엄연한 국가간의 전쟁이었으므로 단순히 ‘왜란’, ‘호란’ 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사료되며, 보다 사적史的인 용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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