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역사 마지막 – 그 정당의 탄생 |
보스톤코리아 2014-02-03, 11:38:26 |
공화당의 정체성 (identity)은 항상 한 곳에 머물러 있었을 것 같은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공화당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때로는 보수의 방향으로 또 때로는 개혁의 방향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동시키곤 했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공화당의 역사”를 시리즈로 쓰게 되었다. 물론, 지난 백 오십 여년을 이어온 공화당의 역사 속에는 이 칼럼에서 건성으로나마 다루지 못한 중요한 순간들이 훨씬 많이 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공화당의 정체성”이었기에, 중요하지만 책상 한귀퉁이로 미뤄둔 역사들은 나중에 다뤄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이 시리즈를 닫기 전 마지막으로 공화당이 왜, 어떤 이념으로 탄생했던 정당이었는지에 대해서 들여다볼 차례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던 혹은 링컨이 집권했던1861년에서 대공황 이후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권을 차지하면서 공화당의 후버 대통령 시대가 막을 내리는 1933년까지를 공화당의 장기집권기로 이야기했다. 약 70년 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은22대 (1885~1889)와 24대 (1893~1897) 대통령이었던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와 28대 (1913~1921) 대통령이었던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이렇게 단 두명뿐이었기에, 이 기간 공화당은 분명 거대정당이었다. 그러나 거대정당으로서의 공화당의 신호탄이 되는 1860년 선거에서 딱 10년만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공화당은 존재하지도 않는 정당이었다. 공화당이 탄생한 것은 1854년 무렵이었다. 이전까지는 2차 정당 시스템으로 명명되는 시기로서 민주당 (Democratic Party)과 휘그당 (Whigs)이 양당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1824년 선거 이후 (잠시나마 미국의 단일 정당이었던) 민주-공화당 (Democratic Republican Party)으로부터 앤드류 잭슨 추종자들이 분화하면서 1828년 경 민주당 (Democratic Party)이 탄생했다. 민주-공화당의 다른 분파였던 국민 공화파 (National Republican)인사들이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독주를 “앤드류 대왕 1세”의 독재라 비판하면서 스스로를 (영국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휘그당원에서 유래한) Whigs라 명명했던 것이 그대로 1834년 탄생한 이 정당이름이 되었다. 1830~40년대 민주당과 휘그당의 중요한 차이를 꼽자면 민주당은 사회, 경제적 문제에 있어 (연방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보다는) “각 주의 권리”를 중요하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고, 보호 관세나 중앙 은행 ( National Bank)에 반대했고, 영토의 확장과 외적 성장을 선호했다. 주로 남부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동부의 금융가와 서부의 신흥 정치인들이 주가 되었던 휘그는 헨리 클레이 (Henry Clay)가 1816년경부터 주장했던 아메리칸 시스템, 즉 중앙 은행, 국토 개발, 그리고 보호 관세 등을 내세우면서 사회적 내실을 주장했다. 상업자본가, 산업가 등을 위주로 하는 정책으로 북부와 서부의 고른 지지를 받았던 이들은 의회에 의해 지지되는 더 강력한 연방을 주장했다. 영토의 확장과 관련해서 휘그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으로 영토의 팽창이 (노예제를 둘러싼 이견등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어쨌거나 1840~50년대의 미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했던 쟁점 중의 하나는 노예제를 새롭게 생겨나는 주(States) 혹은 준주 (Territories)로 확산해도 좋은지의 문제였다. 문제는 과거의 휘그당이 그 노예제 문제를 정당 차원에서 다루는 데에 있어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1850년에 이르러 2차 정당시스템의 양 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지역적인 차이에 의해, 노예제 존속에 대한 찬반 여부를 놓고 각각 내부적인 분열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 정당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8년 자유 토지당 (Free Soil Party)의 등장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민주당과 휘그당이 아닌 제 3의 정당이 “노예제 확산 저지”라고 하는 한 가지 이슈에 공감하는 다수의 정치세력, 즉 “양심적” 휘그, 반-노예제 민주당원 등에 의해 탄생했던 것. 이들은 서부의 새로운 영토로 노예제를 확산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노예제가 없는) 자유로운 땅에서 이루어지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들의 자유로운 노동이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노예제 노동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으나 자유토지당은 노예제 폐지론자 (abolitionists)들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이들이 노예제를 근절해야 한다고 봤던 이유는 노예제의 존재가 백인 노동과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를 저해한다고 봤던 탓이었다. 1852년경, 자유토지당은 노예제 폐지론과의 온도차를 놓고 서서히 와해되었다. 그러나 185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노예제의 확산 여부를 둘러싸고 정당 간의 갈등이 아닌, 지역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몇 년전 자유토지당을 구성했던 이들과, 주로 북부에 기반을 둔 “자유” 민주당원들, 그리고 “양심적” 휘그등이 노예제 확산을 저지할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했고 1854년 창당한다. 신생정당에는 심지어 아일랜드 등지로부터의 이민자 유입에 적대적이었던 네이티비스트 (Nativists)의 일부도 힘을 보탰다. (자유 토지 운동에는 반대하지만 연방이 각 주의 이해에 우선한다고 봤던 기존 휘그들은 공화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그렇게 이질적인 정치세력의 연대에 의해 탄생한 정당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주로 거대 자본을 옹호하는 정당으로 자리잡은 공화당의 정체성이 하루 아침에 후딱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보스톤코리아 칼럼니스트 소피아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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