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역사 (6) 시오도어 루즈벨트-개혁과 제국 사이 2 |
보스톤코리아 2014-01-27, 11:26:12 |
지난 칼럼에서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적어도 국내 문제에 관한한 “개혁적”인 (혹은 혁신주의라는 시대 정신이 투영된 듯한) 인물이었음을 언급했다. 첫 째는 19세기 말 거대자본의 공룡화를 가져왔던 트러스트를 규제하려던 점이 그랬고, 두 번째로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당시 19세기 후반의 역대 대통령들처럼 배타적으로 자본가의 이해만을 고려하기보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즈벨트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과 국내문제 개혁에 대한 의지가 출중한 개인이라할지라도, 그의 혁신주의가 진공에서 작동했을 리는 없다. 즉, 1880~90년대 공화당의 머그웜프들이 혹은 1890년대 (주로 민주당 혹은 인민당의) 인민주의자들이 (Populist), 그리고 1897년 탄생한 유진뎁스의 미국 사회 민주당과 같은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노동조합 운동 (Organized Labor Movement)의 세력, 혹은 여러 층위의 사회 운동 세력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미국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나오던, 그야말로 변화가 필요했던 시대였기때문에 루즈벨트의 개혁 프로그램들도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1904년 대통령선거에서 상당히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당선이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충실하게 보다 많은 개혁적 의제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전략이 주효했다. 이 선거에서 사회당, 인민당, 금주당 등 저마다의 개혁을 꿈꾸는 독립 정당들이 후보를 냈지만, 사회의 개혁에 대한 저마다의 열망은 루즈벨트의 공화당이 흡수했던 듯 하다. 이로써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임대통령의 서거에 의해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는 컴플렉스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당선된 이후, 두번째 임기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국정은 보다 혁신적이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확실히 더욱 제국주의적이기도 했다.) 가령 1906년 엘킨스법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정한 헵번 법 (Hepburn Act, 1906)을 제정했는데, 1887년 설립된 주간 통상 위원회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철도 회사들의 임의적인 운임 차별 등의 문제를 없애려던 시도였다. (19세기 철도회사들은 운송물량이 큰 고객들과 영세 업자들 간에 차별적인 요금을 적용한다든가, 뇌물을 제공함으로써 독점망을 구축했다.) 헵번 법을 통과시키면서 루즈벨트는 “악덕 트러스트 (Bad Trust)가 감시와 규제의 대상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데, 사실 루즈벨트가 트러스트 자체를 미워했다기보다는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바라보는 시각이 19세기의 대통령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의 “트러스트 파괴자”라는 별명에는 어쩌면 약간의 오해가 섞여있다고도 보겠다. 루즈벨트 재임기 동안 트러스트는 어쨌거나 “건재”했으니까. 또 한편 1906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법안들을 통과시키는데, 오늘날의 FDA의 존재 이유가되는 식품 및 의약 청정 법Pure Food & Drug Act (1906) 과 육류 검사 법Meat Inspection Act (1906)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것은 당시 공화당 내에 개혁인사로 분류될만한 사람이 단지 루즈벨트 개인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가령 1906년 위스콘신 주지사에 당선된 로버트 라폴레트 (Robert La Follette)는 19세기 말엽의 보수파 (이른바 올드 가드 Old Guard) 공화당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치 개혁을 선도했던 인물이다. 19세기 말엽까지 공화당 보수파의 전반적인 성향은 정부가 기업을 도와주지만 규제는 풀어주는 Laissez Faire를 선호했다. 공화당 비-보수파 인사로서는 최초로 상원의원을 지내고, 후에 위스컨신 주지사가 된 라폴레트의 경우, 상원의 직접 선거, 주민 소환, 주민 발의, 정부의 기업 규제, 공무 개혁, 주 소득세, 직접 예비 선거 등을 내세웠다. 이러한 개혁 입법들은 물론 당시로서는 주정부차원이었지만, 점차로 연방차원의 개혁 입법을 예고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실제로 연방차원의 소득세 부과 및 상원의원의 직접 선거와 같은 내용은 각각, 수정헌법 16조와 수정헌법 17조를 통해 1913년 이후 연방차원에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후임으로 1908년 선거에서 당선된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 (공화당)이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루즈벨트대통령과 비교해서 덜 개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1908년 선거 이후 미국을 잠시 떠났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신임 태프트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환경보호 정책 등에서 태프트 대통령에게 이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1910년 정치 무대로의 복귀를 준비한다. 1910년 루즈벨트가 가져온 슬로건은 “새로운 민족주의 New Nationalism” 이었다. 루즈벨트는 당시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어야하며, 정부의 목적은 국민의 복지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민족주의의 기치아래 대기업에 대한 규제, 관세 개혁, 상속세및 수입세, 통화 개혁, 노동 개혁, 주민 발의, 주민 소환등의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12년 선거,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화당 보수파의 저지로 공화당의 후보로 지명되는데 실패한다.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혁신당 (Progressive Party)를 구성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공화당의 표를 분산시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에 기여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20세기 초 공화당의 분열은, 스스로의 자정노력일의 결과였을 수도 현대정치의 출발점일 수도 있었을 게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0] |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
|
프리미엄 광고
161 Harvard Avenue, Suite 4D, Allston, MA 02134
Tel. 617-254-4654 | Fax. 617-254-4210 | Email. [email protected]
Copyright(C) 2006-2018 by BostonKorea.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and Managed by Loopiv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