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7 |
보스톤코리아 2014-01-13, 13:32:46 |
임진왜란때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3명의 승장은 휴정 서산대사와 유정 사명대사 그리고 기허 영규대사이다. 서산과 사명은 전란중에서 살아 남았지만, 영규대사靈圭大師(? – 1592)는 청주성을 수복한 후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영규의 삶을 먼저 따라가 본다. 그는 공주 태생으로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출가했으며 속명은 박기허朴騎虛이다. 호는 기허당騎虛堂이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이다. 그는 계룡산 갑사의 청련암에서 무예를 수련하였다. 그의 무예가 특출하여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갑사는 계룡산 서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사찰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갑사는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 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중의 하나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갑사는 백제의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인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26)이 창건하였다. 그리고 이 사찰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시대이다. 556년(위덕왕 3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진광명전 및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가 당우 천여칸을 중수한 후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이 갑사는 신라의 화업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갑사의 청련암에 수도하며 무예를 수련하던 영규대사는 승병 800여명을 통솔하는 승병장이 되어 충청도의 의병장 조헌과 연합하여 8월1일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그가 최초의 승병장이었으며 그의 의기와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승병들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연이어 벌어진 금산전투에서 영규대사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병사와 무기 등의 열세로 거의 모든 의병들을 잃어 버리고 영규대사 자신도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1592년8월30일에 입적하였다.27) 의병장 조헌도 8월18일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출가하여 수행하고 무예에 정진했던 갑사는 정유재란(1597년)때 거의 전소되었다. 1604년에 중수했으며 다시 효종(1654년)때 중건하였고, 1738년(영조14년)에 건립한 경내의 표충원에는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승병장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그리고 이 갑사에서 출가했던 영규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후 고종(1875년)때도 크게 중건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갑사에는 불교계의 귀중한 보물이고 우리의 찬란한 문화 유산인 ‘월인석보’를 찍어내던 판각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판목이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하여 세조때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상절은 부처의 일대기이며 세종때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편찬하였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찬가를 지은 것이다. 이 월인석보판목 외에도 갑사에는 철당간(보물 제256호), 고려 초기의 부도(보물 제257호) 등 지정된 보물뿐만 아니라 갑사의 전체가 우리의 보물이다. 26) 아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해동고승전 등 여러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모두 다르다. 첫 째로 삼국사기의 소수림왕4년의 기록을 보면 “승아도래僧阿道來” 라고 되어 있다. 즉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가 372년(소수림왕 2년)이니까 374년에 고구려에 왔으며 인도 승려로 추정한다. 둘째는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고구려에서 신라로 가서 불교를 전한 최초의 승려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인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눌지왕(417 ~ 458 재위) 때 신라로 왔으며 소지 마립간(479 ~ 500재위) 때 모례毛禮의 집에서 죽었다. 그 다음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인데 200여년이나 앞선다.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 16세 때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 굴마를 찾아 뵙고, 19세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 와서 어머니 고도령의 명으로 미추왕 2년(263)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하려다 실패했다. 그러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주고 나서 불교 전도의 허락을 받았다. 미추왕 사후 불교배척으로 인하여 모례의 집에 숨어 살다가 죽었다. 모례와 누이 사씨는 아도가 설하는 불교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첫 번째의 신도가 되었고, 사씨는 점점 불경에 빠져 마침내 계를 받고 출가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이다. 삼국유사의 인색한 그녀의 기록, “신라 모례의 누이 사씨가 고구려 승려 아도에게 감화되어 출가한 뒤 영흥사를 창건했다.” 이 내용은 묵호자의 행적과 비슷하다. 27) 칠백의총은 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영규대사와 조헌을 비롯한 칠백의사를 모신 곳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으며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에서 왜군들이 퇴각한 후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모든 유골들을 거두어 하나의 무덤으로 만들고 ‘칠백의총’이라고 하였다. 그 후 백성들은 해마다 시향을 지내왔다. 일제시대때 일본이 의총을 허물고 선조왕이 세운 순의비를 폭파했다. 왜적들이 나라를 지키려던 의병들을 죽이더니 그 후손들은 나라를 위하여 순절한 의병들을 무참히 부관참시까지 하는 악행을 지질렀다. 일제하에 폭파된 비석 조각들을 감추어 보관했던 금산 주민들이 해방 후 1952년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 1963년 사적으로 지정한 후 종용사, 의총문, 취의문, 순의비각 등을 세우고, 1977년 기념관을 신축하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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