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3 |
보스톤코리아 2013-11-25, 12:13:36 |
조선에는 무술이 없었다 - 사실 이 ‘무술’이란 단어는 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조선시대는 물론 그 이전에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무예武藝’라는 단어가 469회가 나오고, 승정원일기(인조원년 – 고종18년)에는 무려 2,800회나 등장한다.20) 또한 비변사등록(광해군 – 고종)에도 127회가 등장한다. 그런데 ‘무술武術’ 이라는 단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역한 실록에서는 17회 정도가 보인다. 이것들도 만일 무예로 국역을 했다면 무술이라는 단어는 전무하다. 일례로 ‘박중선朴仲善21)의 졸기卒記’에 보면 ‘仲善少業武’(중선은 어릴때 부터 무술을 잘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武’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무술’로 국역을 했다. 물론 조금도 틀리지 않지만, 조선시대의 사서들을 보면 당시에는 무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예의 수련이 그 전시대에 비해서 줄어든 것으로 비추어지지만 그 무술이 군사적인 면에서 조금 덜 필요했었지 무예 그 자체의 호응도가 떨어지진 않았다고 본다. 정사중의 정사로 꼽히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서만 보아도 아주 방대한 사료들을 접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부터 정조대에 이르기 까지 수박手搏, 수박희手搏戱라는 단어가 33회가 보인다. 이는 조선 전반에 거쳐 특정한 무예인 수박희가 널리 수련되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무인武人(조선왕조실록 668회, 승정원일기 457회)과 무과武科(조선왕조실록 2,145회, 승정원일기 8,398회)등의 용어가 부지기수로 나온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수박이라는 용어가 없어지고 무예라는 용어가 사서에 더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태껸’이나 ‘택견’으로 불이우며 기록할 때는 한자의 武藝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병술적인 면에서의 무예가 줄어들면서 무예의 수련은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찾아 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사들을 비롯한 수 많은 사서들이 넘쳐나는 가운데서도 갈증을 느끼고 있음은 우리는 무예나 무술보다는 그 당시에 수련된 무도武道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20) 태백산사고본 원문 21) 박중선(1435 – 1481)은 무신으로 무과에 일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세조 때 병조판서, 성종 때는 무신으로 드물게 이조판서를 지냈다. 어머니가 심온의 딸, 그러니까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동생이다. 세종이 이모부이며 문종과 세조는 이종사촌이다. 그리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을 사위로 맞았기에 세조와는 사돈간이기도 하다.(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세조는 정비 정희왕후로 부터 두 아들을 얻었다. 맏아들이 의경세자이고, 차남이 해양대군으로 이 해양대군이 세조가 죽은 후 조선의 8대 왕으로 오른 예종이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는 20세때 세조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그는 1445년 처음에는 도원군에 봉해졌다가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글씨를 잘 쓴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어려서 부터 잔병이 잦았으며 그를 포함한 세조의 가족들은 늘 어린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았다. 그는 죽기 전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황후의 혼령에 시달리며 무척이나 괴롭게 죽었다. 그래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들어내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의경세자는 후에 소혜왕후로 추숭된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월산대군이고 둘째가 자산군이다. 그 자산군이 예종이 일찌 죽는 관계로 왕위에 오르니 성종이며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숭되었다. 세조 또한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뱉은 침이 온몸에 종기로 번져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고, 이어 즉위한 어린 예종도 낮잠을 자다가 단종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가위에 눌려 죽었다고 전한다. 예종이 죽을 당시 그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는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갔다. 의경세자 또한 장자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왕위를 13세의 어린 성종에게 주고 7년간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정희왕후는 예종과 성종 두 왕을 수렴청정하였다.) 박중선의 맏딸이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부인) 이며 그녀는 미모가 출중하였다. 월산대군이 죽은 후 연산군은 백모인 승평부부인을 겁탈하였고, 그로 인한 수치심으로 그녀는 자결을 했다.(임신 또는 성병의 감염 등의 설도 실록에 보인다.) 박중선의 아들은 후일 성희안과 함께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모자 박원종이다. 그의 둘째딸은 장경왕후(중종의 제1계비)의 어머니이며, 그 장경왕후의 아들이 인종이다. 막내딸은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계비이다. 이 막내딸은 성종실록(142권, 1482년 6월11일)에 동성애를 한 것이 적나하게 실여 있다.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가 여종들(내은금, 금음덕, 둔가미 등) 과 동침하였으며, 추궁 결과 여종들이 자신을 겁간하려 했다고 하였으며, 여종들은 의금부의 국문과 매질에 못이겨 박씨에 대한 모함이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이 일로 제안대군과는 이혼을 했다. 예종의 장자로서 차기 왕위의 일순위였던 제안대군은 단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좌에 오르지도 못하고 평생을 ‘바보처럼’ 산 비운의 왕자중의 한명이다. 명종때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그는 상당히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한 여자의 음문은 더러운 곳이라고 하여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유는 평생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고 한다. 또한 성종실록에 보면 그가 여색을 멀리한 기록도 있지만 원해서 이혼했던 첫부인과 재혼해 달라고 성종에게 간청하는 기록도 있다. 하여간 그는 처복은 없었으며 자식들도 없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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