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12 |
보스톤코리아 2013-11-18, 13:29:55 |
또 하나의 아주 비열한 김돈중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1167년(의종21년) 정월 연등회가 있던 날, 김돈중이 탄 말이 징과 북소리에 놀라 날뛰는 와중에 그의 전통에서 화살이 나와 임금이 탄 수레 앞에 떨어졌다. 항상 겁이 많던 의종은 그 즉시 환궁을 하여 경위를 조사하였다. 김돈중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아무도 그의 위세에 눌려 이실직고를 하지 못한 관계로 수 많은 애매한 사람들만 참형을 당했다. 이 비겁하고도 간악한 그의 행동을 보고 정중부는 그를 더욱 미워하였다. 다음은 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에게 방자한 문신이나 내시들이 얼마나 고압적인 자세로 그들을 천대했는지 살펴보자. 의종은 황음荒淫하여 정사는 돌보지 않고 한뢰, 임종식 등을 총애하면서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묵인해 주었다. 그들은 왕의 총애를 빙자하여 무신들을 멸시하였으니 무신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1170년(의종24년) 8월29일 의종이 연복정에 나가 총신들과 함께 질탕하게 연회를 하였다. 의종은 또 흥왕사로 자리를 옮겨 밤을 새워가며 놀았다. 다음날 역시 의종은 환궁하지 않고 흥왕사에서 보현원으로 갔다. 그리고 시신侍臣들을 불러 술을 따르게 하며 “장하도다, 이곳에서 가히 군병을 연습시킬 만하다.” 라면서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을 하라고 명하였다. 의종의 의도는 여러 날 끼니도 잘 챙기지도 못하고 고생한 무신들과 무사들을 위로하고 포상을 내리려고 한 것인데, 왕의 은총을 시기한 문신 한뢰 등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겨루기를 하다가 패하여 달아나자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소응이 뜰 아래로 떨어져 넘어지자 왕과 문신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 희희낙낙하였다. 이에 무신들은(정중부, 김광미, 양숙, 진준 등) 수치심에 안색이 변하면서 서로 눈짓을 하면서 손이 차고 있던 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중부가 “소응이 비록 무부이기는 하나 벼슬이 삼품인데 어찌 이다지 모욕을 심하게 주느냐!” 하니, 왕이 정중부의 손을 잡으며 화해를 주도하고 위안을 주려고 했지만 계속 분위기는 살벌하였다. 한편 이날 정중부가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거사를 할만하다. 그러나 왕이 바로 환궁한다면 아직 참고 기다릴 것이요, 만약에 보현원으로 옮겨간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이 갔을 때 거사를 하였다. 김돈중은 난이 난것을 알고 중도에서 술에 취한 척 하며 말에서 떨어져 도망쳤다. 그리고 한뢰는 왕의 침상밑에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 하려 했지만 이고의 칼에 죽었다. 그 날 그들은 노영순을 비롯한 몇명만 제외하고 140여명의 문신들을 도륙하였고 암호를 몰랐던 무신들도 많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궁궐로 돌아와서 숙직하던 문관들을 다 죽이고 있는 가운데 왕은 이의방과 이고를 중랑장으로 8등급이나 높이 벼락 출세를 시키고 정중부는 상장군으로 1등급 승차하였다. 다음날 환궁하여 왕을 폐위시켜 거제도에 유배시키고,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하라”는 명에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후에 명종)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 후 김보당 등의 복위세력들이 거병하여 의종을 경주로 데리고 가서 웅거하였다. 하지만 1173년 의종은 자신이 총애했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사찰의 연못에 수장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후세의 사가들의 연구평가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최초의 성공한 군사구데타라고 평가하면서 무신의 난을 문신과 환관들의 교만과 방자한 언행으로 무신들을 멸시하여 그 화를 자초하였다고 하며, 또 다른 평가는 이자겸의 난으로 외척들이 발호하여 권력을 독점함에 위협을 느낀 의종이 일부 무사들을 총애하면서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왕실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때 그 원인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의종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시문과 술로 시도 때도 없이 문신들과 연회를 열었고, 지나치게 격구와 오락을 좋아했으며, 귀신을 두려워하여 무당을 좋아하여 사당 등에 거금을 쾌척하느라 국고를 낭비하였고, 특정 신하들만을 총애하여 조신들간의 마찰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무신들이 잡은 정권은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는 일상을 반복하다가 결국 최충헌의 무신정권이 등장하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무예의 면만 조금더 살펴 보면 의종은 수박희를 대단히 좋아했으며 왕 자신도 직접 즐겼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이의민은 수박에 아주 능했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하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박희의 시연을 즐겼다는 것은 그 당시 모든 무신들이 수박에 능수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무신정권의 기반이 사병私兵이었으며, 귀족들이나 권문세족 그리고 말기에 등장하는 사대부 등 모두가 사병을 소유하였으며 그들은 무예를 체계적으로 수련하면서 전승하였다. 이성계도 ‘가별치’라는 조직적인 사병을 소유하고 훈련시켰으며, 그 위에 정도전의 지략이 가해지면서 조선의 여명을 밝힐 수 있었다. 사실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힘을 좀 쓰고 세력을 유지하려면 무예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시대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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