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9-23, 16:23:48 
 1953년 3월 소련의 스타린수상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크게전해졌다. 스타린수상의 사망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8.15해방 후 유엔결의의 총선을 반대하여 한국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공산주의의 독재자 스타린( 1879~1953)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인지 74세로 급서했다. 스타린의 사망으로 동구공산권의 변화와 세계평화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 유엔대사 마리크가 소련수상직에 올랐다. 마리크는 수상직에 오른 후 곧 한국전쟁을 끝내는 정전회담을 갖자고 1953년 7월 연합국에 제안했다.  연합국은 소련의 정전회담의 제안을 받아들여 7월 12일 회담을 시작했다. 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과 전선을 살펴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을 더 계속하여 승리 해봤자 동서의 냉전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완전한 승리를 하기 어려웠다고 보았던지 소련의 의사를 받아들여 회담이 열린지 15일만에 합의를 보고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을 조인하였다.

정전회담의 성립으로 3년1개월에 걸쳐 산하를 온통 흔들고  강산을 선혈로 얼룩지게한 한국의 남북전쟁은 일단 그 막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휴전이라는 것이다.그래서 휴전을 반대하는 운동도 없지 않았다.
사실 남북통일이 목적이었다는 이 전쟁은 막대한 희생만 내고 만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종래의 38선은 휴전선 (DMZ, 비무장지대) 으로 그대로 남아 분단의 역사를 계승하는 슬픈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을 합한 전사자가250만이었고, 민간인 사상자가 150만명이었다. 그리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전국토의 반 이상이 초토화되었다. 그런데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것이다. 미군의 전사자는 5만4천명이었으며 부상자가 10만3천명 이었다고 한다. 북한군과중공군은 그 10배가 될 것이라고 했다 (The Columbia Encyclopedia, Korean War. 참조).    

통일이 목표였다는 이 한국의 남북전쟁은 그 옛날 미국의 남북전쟁과는 양상이 아주 다른 국제적인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을 종주로 하는 동구 공산주의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민주세력간의 대결의 인상이 농후하였다. 그러므로 제한된 국지전으로서는 동서냉전의 근본문제의 해결이 어려웠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통일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통일은 그 시기의 도래를 기다려야할 일이었다.  그런데 성급히 전쟁을 일으켜서 피차에 별 소득없이 막대한 희생만을 내고만  전쟁이라는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으로 어부지리(漁夫之利)의 재미를 본 것은 일본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곧 일본의 안전과 한국전쟁의 수행을 고려하여, 1951년 9월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따라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의 점령시대를 종식하고 완전 자주독립국이 되었다. 그리고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과 전쟁무기의 수려등으로 황폐 되었던 산업시설을 완전히 복구하고 특수경기의 호황을 맞았다. 

이후로 일본의 공업시설은 모두 자동화로 전환되었으며 선진 고도기술의 도입으로 일본은 세계경제 대국으로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기뻐했다고 한다(昭和史 283 페이지 참조). 일본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망하여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 일본의 동경제대의 유명 교수 가미가와 하지메(河上肇)가 종전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즐거워하였다고 한다.  “아 기쁘다. 어떻게 되었든지 전쟁이 끝이 난 오늘을 맞네”(필자 역, 소화사 247페이지 참조). 그 시를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더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일본의 총리대신 아베신조(安倍晉三)가 주장하기를 일본의 침략여부는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베총리는 소학교도 건상 다닌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이 왜 일어 났으며 급기야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1895년 청일전쟁이후 침략으로 획득하였던 만주와 대만 그리고 기타 대소 섬들을 다 내놓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자가 일본의 총리가 되었으니 세상이 조용할 것 같지 않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는 격언이 있다.  제국주의 침략자 일본이 지금에 과연 변화가 있겠는가이다. 남의 나라 일이라 길게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일이다. 어쨌든 휴전이었지만 싸움이 끝나 모두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으니 마음이 놓였다. 휴전회담의 성립으로 정부가 1953년 8월 15일 서울에 환도했다. 정부의 환도에 따라 피난민들도 속속 귀가길에 올랐다. 

나는 부산 임시도서관의 정리와 또 부산에 가져갔던 도서를 가지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결혼한지 얼마 되지않은 아내에게 어머님 아버님과 90이 넘은 할머님을 모시고 먼저 서울로 올라가라고 이르고 나는 9월 중순에 서울로 돌아 왔다. 그런데 그때까지 서울대 건물을 미군이 사용하고 있어서 도서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가지고 온 도서와 용품은 을지로 6가의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복도에 가져다 쌓아 놓고 도서관 건물이 명도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중추가절이 무색하게 가을비가 쓸쓸하게 내리는 것이다. 전쟁이 휩쓸고 간 도성은 황량하여 두보의 시 ‘나라는 파괴되고 산하만 남았네’(國破山河在) 바로 그것이 었다. 서울대 건물이 미군으로부터 명도된 것은 10월 15일 이었다.  동숭동의 서울대 건물은 북한군에게 두번이나 점령되었어도 폭격이나 화재가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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