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향십리(花香十里) 인향만리(人香萬里)
보스톤코리아  2013-06-10, 17:22:38 
서울 광화문에는 글판이 붙어 있다. 교보문고 멋적은 벽에 걸려 있다. 계절마다 바뀌는데, 글판을 읽기 시작한지 몇년 됐나 보다. 처음 읽은 건, ‘대추가 저절로 붉어 질리가 없다/저안에 태풍몇개/천둥몇개/벼락 몇개.’ 였다. 약속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읽고는 ‘문화 충격’을 받았다. ‘수출 만이 살길이다’ 뭐 이런 류의 구호만 기억하니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한참을 서서 혼자 중얼거렸고, 되풀이 읽었으니 말이다. 

후배는 글이 바뀔 때 마다 글과 사진을 보내온다. 내 스스로 찾아 볼수도 있다만, 그가 보내주는 걸 기다린다. 보내 준것 중에 하나가 ‘지금 네곁에 있는 사람/내가 자주 가는 곳/네가 읽고 있는 책들이/너를 말해 준다.’  책도 폼나는 것만 들고 다녀야 한다.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말해 준다 하지 않았나. 하긴 한국 군대에서 졸병시절엔 선데이 서울이 필독서였는데.  하지만, 요사이에는 아이패드로 읽거나 보니 책 표지에 신경쓰고, 남이 볼세라 눈치볼건 없을 게다. 성경은 들고 다니기에 적당하다. 차 뒷좌석에 성경이 있다면 괜찮을 듯 싶다. 

신문에서 읽었다. ‘지하철은 롤모델’이란다. 같이 나눈다. 
‘며칠 전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완벽한 아웃도어룩을 한 채로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있는 50대 중반쯤의 남자분을 보았다. 나는 그 순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분간 이 양반이 내 롤모델이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들처럼 당당하고 부드럽게 나이 들고 싶다. 고전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삶, 그리고 내 불편을 조금 감수하고라도 다른 이의 더 큰 불편을 위로하는 삶 말이다. 이렇게 가까운 눈앞에서 아름다움과 삶의 품위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분들을 롤모델이 멘토가 아니라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한국일보 5-31-2013, 길위의 이야기, 김도연

광화문 글판과 이 짧은 글이 겹쳤다.  롤모델이나 멘토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중후한 중장년中長년이 되는 건 누구나 바라는 바인데. 쉽지는 않을 게다. 

아이쿠,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내 모습을 떠올렸다. 다행한 일은 책을 읽기는 했다. 헌책방에서 구했던 ‘관촌수필’을 읽고 있었는데, 아주 아주 잠시였던게 문제다. 전철에서는 앉으면 졸음이 먼저다. 내게 책이 수면제인데, 한국 전철은 안락하다.  망연히 쳐다보았던 승객이 있었다면, 아아~ 종이책읽는 모습은 신기했을 게고,  졸고 있는 모습은 역시나 다르지 않은 중년의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모두들 아이폰으로 뭔가를 읽거나 듣고 있었으니 크게 관심도 없었으면 다행일 텐데. 참 손잡이에 매달려 잘 수는 없다. ‘엽기적인 그녀’가 아닌 바에는 기댈 수도 없어 잠들 수 없다는 말이다. 하긴 다른 승객에 대한 관심은 크게 적어졌음에 분명하다. 

화향花香 십리에 주향酒香 백리이고, 인향人香 천리라 했던가. 잘 익어 가는 술내음은 목월의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하지만,  푹 익어 천리만리 날아가는 사람냄새와  농濃익은 인격을 만나는건 매우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가까이서 한마디라도 듣고, 쳐다보고 한수라도 배울 수 있다면 복된 일이라는 말이다. 이 나이에도 멘토는 필요하다. 흠없는 멘토쉽도 배워야 한다. 

우리 동네에 훌륭한 선배들을 모시고 살 수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복이다.  참 성경에서 내 멘토는 바울사도다.  내 아이 영어 이름이 폴인데 아비인 내가 지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 복음 14:26)
내가 경험한 보스톤 전철은 무지 흔들리고 시끄럽다. 한국 전철이 한수 위다.


김화옥  (보스톤코리아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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