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와 사하로프 |
보스톤코리아 2013-02-04, 15:11:45 |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핵 융합 폭탄, 즉 수소 폭탄 (H-Bomb)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앞선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은 더이상 원자폭탄을 보유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없었다. 이에 더 해,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것을 속수 무책으로 지켜봐야했다. 이어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 과학자중 한 사람이었던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사실 소련측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의 충격도 수소 폭탄 개발을 추진하게 된 한 이유였다.
즉, 수소 폭탄 개발 계획은, 핵융합 폭탄이 아직까지는 이론적 수준이었지만, 성공할 경우 이미 원자 폭탄을 통해 한 차례 경험한 핵폭탄의 가공할 위협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군비 경쟁에서 소련을 앞서겠다는, “냉전”상황에서 유래한 포부였다. 하긴, 핵무기는 원자폭탄부터 그 태생이 냉전과 샴쌍둥이였다. 트루먼의 수소폭탄 개발 계획이 발표되기 불과 5년 전 1945년 8월, 원자폭탄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원폭 투하 후 얼마 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2차 대전은 마감되었다. 그렇게 끝난 2차대전은 “공식적으로는” “파시즘대 반파시즘” 혹은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전쟁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의 정당성도 파시즘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즉, 원자 폭탄 투하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얻어냈기 때문에, 결국 원자 폭탄은 평화를 위한 도구였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항복 및 2차 대전의 종전에 대해 원자 폭탄 투하라는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혹자는 미국이 이미 1945년 봄, 여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재래식 폭탄을 일본 전역에 투하했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느 정도 공격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의 항복 선언이 원폭 투하 직후가 아니라 재래식 무기의 추가 투하 이후에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있게 들여다 본다. 한편 원폭이 아니었더라도 그 해가 가기 전에 일본이 패망할 가능성은 이미 높았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을 어떤 모양새로 끝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중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은 설령 2차 대전을 끝낸 “종결자”가 원자폭탄이라 해도 원자 폭탄 만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에는 균열을 일으킨다. 원폭 투하 결정은 물론 미군의 인명 피해 없이 단시간에 적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긴 하지만, 원폭 피해는 일본 열도의 민간인들의 몫이 될 것이기에 어마어마한 윤리적 비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잠재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은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을까? 답은 2차 대전 후반부, 종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파시즘 대 반파시즘 구도가 아닌 미국-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하는 세력과 소비에트 세력 사이의 냉전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소련이 독일을 항복시켰던 것은2차 대전의 전세가 결정적으로 연합국 측에 유리해지는 계기였다. 미국은 다시 소련의 적극적 개입이 일본의 항복을 가져올 경우 소련이 연합국 내에서 누리게 될 “승전국”으로서의 위상 혹은 그로써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미국은 소련에 의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미국이 주도하는 승리를 위해 그리고, 미국의 군사 과학기술의 현재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50년 트루먼의 수소폭탄 조기 개발 계획 발표 이후.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그리고 이후 아이젠하워 정부의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원자 폭탄을 개발했고, 수소 폭탄의 이론적 원리를 처음으로 밝혀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역시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 강력했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의 만류는 냉전 시대에 대해 소리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한 때의 국민 영웅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개발 계획에 반대하면서, 매카시즘 세력에 의해 미국의 “적”으로 몰리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트루먼의 발표 후 채 3년이 지나기 전인 1952년 11월, 미국은 서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마이크”라는 이름의 세계 최초의 수소 폭탄 개발-실험에 성공했다. 이론적으로 예측되었다시피 수소 폭탄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00배에 달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55년 11월, 소비에트 역시 수소 폭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냉전의 군비경쟁은 오히려 본격화된다. 소련의 수소 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소련 과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삶도 오펜하이머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수소 폭탄 개발에 성공한 이후 “인민 과학자” 사하로프는 스탈린 독재 체제에 대한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것은 가공할 핵무기가 아닌 협력임을 역설하는 “반핵”의 입장을 피력한다. 사하로프는 197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1990년까지 그는 조국에서 탄압받는 과학자로 살아야했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0] |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 |
|
프리미엄 광고
161 Harvard Avenue, Suite 4D, Allston, MA 02134
Tel. 617-254-4654 | Fax. 617-254-4210 | Email. [email protected]
Copyright(C) 2006-2018 by BostonKorea.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and Managed by Loopiv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