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회 홍하상의 일본상인 탐구 |
보스톤코리아 2012-11-12, 15:36:26 |
코오노이케 가문은 오사카 인근의 이탄(伊丹) 시에서 출발한 대기업이다.
오늘날에는 토목건설회사로서 오사카 지방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본래 그 출발은 이탄의 양조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이다. 서기 1600년 당시 양조장을 운영하던 코오노이케는 쌍백징주(双白澄酒)라는 술을 발매해서 첫 선을 보인다. 그 술은 물처럼 투명한 청주였는데 발매되자마자 단번에 대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막걸리와 같은 탁주가 술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코오노이케 가가 새로운 청주를 발매함으로써 일거에 시장을 장악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코노이케 가문은 양조업 외에 무역선, 환전산 등의 사업에 진출해서 막대한 부를 챙겼고 특히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거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 후 코오노이케 가는 대화천 일대의 버려진 땅을 개발하는 신전 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약 60만평의 땅을 개발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동 오사카시 코오노이케 모토마치(元町)이다. 코오노이케 가문에 전성기는 겐로쿠(元綠, 1688-1703) 시대였다. 코오노이케 가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한 때 조슈(長洲)의 다이묘 모리(毛利)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조슈의 모리 번주는 장사꾼의 돈을 우습게 알고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았다. 약속된 날짜에 돈이 회수되지 않자 코오노이케 가는 모리 가와 거래 중단 선언을 해버렸다. 그 후 모리 가가 참근교대를 하기 위해 에도로 가던 중 돈이 떨어졌고 길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일이 발생했다. 당시 참근교대 병력의 수는 모리 가의 식솔 30여명 외에 300여 명에 이르러 자금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모리 성주는 코오노이케 가에 원조를 청하게 되었으나 코오노이케 가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급기야 모리 성주가 코오노이케 가에 향후에는 어떠한 약속도 어기지 않을 것을 문서롤 보낸 후에야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알력싸움에서 상인이 다이묘를 누른 대사건이었다. 코오노이케 가는 오늘에도 건재하다. 다만 과거와는 달리 건설업이 전부다. 일찍이 대화천의 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60만평의 땅을 개척해낸 경험이 있어선지 작금에는 건설업이 주력 업종이 된 것이다.건설회사 코오노이케 구미(鴻池組)가 건설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71년이다.현재 코오노이케 구미는 종합 건설업 부동산업을 주력으로 4049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감사이지방 유수의 건설회사이다. 사장은 코오노이케 후지이치(鴻池藤一). 코오노이케의 후손들은 건설업 외에 다른 분야에도 진출했다. 코오노이케야 선우위문은 오늘날 일본 사쿠라 은행의 설립자가 되었으며, 홍지옥 선구랑은 대판 미술 구락부와 동화 화재(火災)보험의 설립자, 홍지옥 주삼랑은 후지나미 빌딩의 주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코오노이케 가문은 1600년대 이후 간사이지방의 경제를 아직도 주름잡고 있는 명문 상인 가문인 것이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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