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20-2 최종회 |
보스톤코리아 2012-11-05, 12:13:56 |
1904년 2월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을 일본함대가 격파했다. 노일전쟁의 시작이다. 일본군이 속속 인천에 상륙하여 압록강 쪽으로 진격해 갔다. 일본군은 여순과 대련 그리고 요양과 심양에서 큰 싸움을 벌이며 장춘까지 밀고 갔다.한편 일본의 해군성은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양을 향해 출동했다는 정보를 영국으로 부터 입수하고 해전의 준비를 서둘렀다.
발틱함대가 필경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항해할 것으로 예측하고 동해에서 이를 맞아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일본 해군성은 급히 시마네 현에 지시하여 한국의 울릉도의 속도인 독도를 시네마 현에 부속시키라고 명령했다.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여 부속시켰다. 일본은 한국영토인 독도를 러시아와의 해전을 치르기 위해서 불법적으로 자기네 영토에 편입시킨 것이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행한 이 같은 일은 한 둘이 아니며 또 그것은 노일전쟁 중에 탈취한 것이라 전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일본이 그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볼 때 전혀 말이 안 된다. 메이지의 군국주의 침략적 근성이 재발한 것이다. 그만 방향이 조금 이탈한 것 같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스페인의 지부랄탈 해협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서 멀리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와야 했기 때문에 장장 8개월이 걸렸다. (근대일본의 세계체험, 구자하라 가쓰히네, 59페이지 참조). 일본 연합함대는 영국이 수시로 제공하는 정보로 발틱함대의 이동 상황을 면면히 계산하면서 마산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4여 척으로 이루어진 발틱함대가 1905년 5월 27일 이른 아침 일렬종대로 서서히 대한 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일본 연합 함대사령관 도고헤이하찌로는 “황국의 흥망은 이 일 전에 달렸다”라고 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연합함대로부터 불시의 공격을 받은 발틱함대는 미처 싸울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그만 대오를 잃고 당황했다. 기함 <스와루후>는 조타기의 고장으로 형편없이 격침되고 많은 전함이 속수무책으로 포격 당했다. 겨우 몇 척의 군함만이 독도의 북쪽으로 도망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달아났다. 도고헤이하찌로가 러시아 함대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용한 적은 수의 함선으로 대 함대를 공격하는 전법을 채용하여 발틱함대의 진로를 막고 일제히 공격하였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래서 도고헤이하찌로 원수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영국의 넬슨 제독을 가장 높이 평가하면서 숭배했다. 어쨌든 일본연합함대의 승리로 노일전쟁은 일단 승부가 난 셈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육군은 요양을 공격하고 심양까지 진격했으나, 러시아는 북 만주에70만 대군을 새로이 배치하였다. 더욱이 일본병사는 먼 행군으로 모두 지쳐 싸움을 할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량은 떨어지고, 탄약이 없어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25만의 일본군은 북만주에서 궤멸하고 말 상태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까, 1905년 2월 9일 러시아의 수도 베델스부르크에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니콜라이 황제는 군대를 투입하여 데모대를 무차별 사살하였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한다. 러시아도 내부불안으로 전쟁을 계속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가네코 간따로를 급히 미국에 파견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강화회담의 주선을 부탁하게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러일 강화회담이 1905년 8월 10일 보스턴의 동북 50마일에 위치한 군항 뉴햄프셔의 포츠머스에서 열렸다. 러시아의 대표는 재무대신 윗테이고, 일본의 대표는 외무대신 고무라 주다로 이었다. 8월 29일까지 장장 19일에 걸친 회담에서 일본은 전쟁배상금은 한 푼도 받아내지 못하고 겨우 사할린의 남반부와 남만주 철도의 위양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애매하게도 이 러일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탁월권을 갖는 것을 인정한다.”라는 조항을 삽입하여 조선을 희생양으로 하였다.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역사에서 배우려 하고, 우매한 사람은 현실의 일만을 가지고 말한다.”라고 한다. “과거는 아름답다.”라고도 말한다. 우리의 과거사이기 때문에 더 애처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은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읊은 두보의 서사시의 한 구절이다. 풀어 보면 “나라는 망했으나 산하는 여전하고,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네. “이다. 우리는 한말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19세기 후반의 한국사는 우리민족의 필연한 과제인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하겠다. 한반도는 지리상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삼국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중국의 조공정책에 오래도록 매여 있어야 했고, 최 근세에는 일본 제국의 침략정책에 대항해야 했으면, 청일전쟁 후로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야했던 국제적으로 심히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 위급하고 험난한 난관을 기필코 극복해야만 하는 운명의 과정을 겪어야 하였다. 더구나 노일전쟁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란이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로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에 식민지 정치를 위한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위암(韋庵) 장지연 선생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즉, 이날에 소리를 내어 크게 운다.’ 라는 글을 실어 대한제국의 종말을 고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황실의 안전을 어떻게 바랄 수 있으면 남의 나라에 매여 독립이 없는데 문명 개화운동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더구나 식민지 정치하에서 진보 보수의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직 독립운동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었다. 한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한국은 5천 년의 오랜 역사와 일본에 앞서는 전통의 문화를 가진 민족의 국가이다! 그동안 원고를 정서해 준 집사람과 교정을 보아 준 윤희경 박사님, 그리고 별로 좋지도 못한 글을 마다 않고 실어 준 보스톤코리아 편집부에 충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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