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공동체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필립왕 전쟁 (King Philip's War, 1675) |
보스톤코리아 2012-09-24, 13:46:54 |
영국령 북미 식민지의 발달에서 ‘경제적 문제’가 ‘종교적 문제’보다 중요했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993년 AP US History Free Response Question에서 응용). US History 과목에서 대부분의 학교들이 식민지 부분의 진도를 마쳐갈 지금 시점쯤이라면 물어봄직한 질문이다.
만약, 제임스타운에서 시작한 버지니아 식민지, 캐롤라이나 등의 남부의 식민지라든가, 일명 Mid-Colony라고 불리우는 뉴욕-매릴랜드 정도만해도 종교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식민지의 성장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애초에 버지니아는 경제적 기회를 만들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처음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담배 플랜테이션을 통해 번영할 수 있었던 곳이다. 네덜란드가 상업적 목적으로 건설했던 뉴욕의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가 허용되던 분위기는 영국의 식민지로 바뀐 이후에도 여전했다. 메릴랜드가 카톨릭 영지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긴 하지만 그곳의 성장 역시 플랜테이션 농업이 견인했다. 카톨릭 인구는 초기의 영주계급 정도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식민지들이 영국 왕실이 직접 관리하는 왕실 식민지 (Royal Colonies)로 바뀌어가면서 버지니아, 매릴랜드, 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남부 주들에서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 Anglican Church) 가 공식 종교가 되었지만, 실제 영국 국교회의 식민지 거주민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한 편이었다. 청교도 공동체를 건설하고자했던 뉴잉글랜드 하지만 아마 매사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답변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알려져있다시피 1620년 매사추세츠에서 처음 설립된 플리머스 식민지는 분리주의 청교도들 혹은 필그림 파더들에 의해, 또한 1629년 보스톤 을 중심으로 설립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Massachusetts Bay Colony)는 비-분리 주의 청교도들에 의해 각각 설립되었다. 어쨌거나 뉴잉글랜드 초기 정착민들의 이주 목적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건설을 이끈 존 윈스럽이 “언덕 위의 도시 (City Upon a Hill)”를 통해 설파했다시피,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와 죄로 가득찬 영국”을 떠나,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되는 모델, 청교도주의가 실현되는 청교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청교도주의는 종교 개혁가 칼뱅 (Calvin)의 사상에서 유래하여 청렴과 근검, 소명의 성실한 이행을 강조한다고 알려져있다. 실제로 초기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은 청교도 정신 때문이건, 혹은 정착 초기라는 특수성 때문이건 “청교도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식민지의 팽창, 원주민들과의 대립 매사추세츠만 식민지가 건설될 무렵부터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이 급증했다. 더 많은 “청교도 마을”들이 들어섰겠지만, 영국계 정착민의 급증은 북미 원주민들과 정착민들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청교도들이 청교도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정착 초기 원주민들과 뉴잉글랜드 지역 정착민들 간에는 왐파노아그의 추장 마사소이트가 참여한 평화 조약을 중심으로 대체로 평화로운 공존기가 있었다. 정착민들은 원주민들로부터 뉴잉글랜드의 기후와 지리적 조건에 맞는 농사법을 배웠고, 마사소이트 자신을 포함 일부 원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그러나 이주민의 급증은 토지 수요의 증가를, 그리고 토지를 둘러싼 갈등의 급증을 불러왔다. 1630년대의 피쿼트족과 뉴잉글랜드 정착민-나라간세트, 모히칸족 연합 간의 전쟁이 토지 분쟁이 불씨가 된 전쟁의 대표적 예이다. 이 전쟁의 결과 대부분의 피쿼트족은 노예가 되어 팔려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불운은 피쿼드족에 그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력이 커지고, 과거처럼 인디언들에게 의존적일 필요가 없어진 정착민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는 더욱 불손해졌다. 가령, 플리머스는 무력을 동원하여 왐파노아그족에게 원주민들의 토지를 매각하라고 강제했다. 마사소이트가 사망하면서 왐파노아그의 추장은 마사소이트의 아들 왐수타에게, 다시 왐수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또 다른 아들인 메타콤 (필립)에게 계승되었다. 토지 문제로 왐파노아그와 정착민들이 첨예하게 갈등하던 와중에, 백인 정착민들이 메타콤의 측근이었던 인디언들에게 개종 인디언에 대한 살인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메타콤이 청교도 마을을 습격했다. 왐파노아그와 전통적인 적대관계에 있던 1630년대 피쿼트 전쟁에서 백인들이 피쿼트족에게 그랬듯, 원주민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등 민간인도 공격을 했다. 이른 바 필립왕의 전쟁이다. 필립왕의 전쟁은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전쟁 중 가장 잔인한 살육전쟁으로 기록된다. 결과적으로는 전력이 우수한 정착민이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미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급감한 왐파노아그족은 전쟁 도중 목숨을 잃거나 버뮤다에 노예로 팔려가면서 멸족을 당했다. 목이 잘린 메타콤의 머리는 20년동안 “전시”되었다. 오만과 편견 필립왕의 전쟁이 정착민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그 전쟁의 전후에는 청교도들의 청교도 정신과는 어딘지 거리가 있어보이는 행태가 있었다. 토지 문제에 관한 탐욕을 감추지 않았고, 타자인 인디언들은 사탄화했다. 혹시 필그램 파더들은 칼빈주의의 예정론 (Predestination)을 받아들이고,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정착지의 성장과 함께 잘못된 선민 의식을 키워갔던 것 같다. 청교도 공동체의 오만과 편견이 아닐 수 없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칼럼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은 WisePrep 소피아선생님 (617-600-4777, [email protected])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npr.org/2012/09/04/160578836/transcript-michelle-obamas-convention-speech 이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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