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명태조 주원장은 고려인이었다(8) |
보스톤코리아 2006-12-13, 00:43:38 |
백 린 (역사학자)
홍건적의 난과 여명관계 중국에 큰 변란이 일어나거나 왕조가 바뀔 때 마다 그 여파는 한반도에 까지 파급되게 마련이었다. 1350년 대의 홍건적의 반란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나라에 파병되었던 고려군이 철수하자 홍건적 일파인 방국진과 장사성이 1358년부터 1364년 사이에 각각 4차에 걸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거나 직접 자신이 찾아와서 원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공민왕은 그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의 정세가 아직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원쪾명의 교체과정에 있어서 고려조정은 반원과 친원의 두파로 나뉘어 국론을 통일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요동으로부터 홍건적들이 대거 밀려들어왔다. 1359년 12월에 홍건적 4만명이 압록강을 건너들어와 평양을 점령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방실, 안유 등 여러 장수가 나아가 평양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타파하였다. 제 1차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살아남은 적군들은 압록강 저편으로 달아났다. 1360년 3월에는 홍건적들이 바다를 건너 서해도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곧 격퇴되었다. 3차로 홍건적은 1362년 12월에 10만명의 대 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지나 개경으로 진격해왔다. 공민왕과 왕비 노국 대장공주는 멀리 안동까지 피난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다행이 이듬해 1363년 정월에 정세운, 안유 등이 군사를 재 정비하여 나아가 홍건적을 격파, 개경을 수복하고 패잔병을 추격하여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혼비백산하여 요동땅으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요동땅에 군집하였던 홍건적들은 완전히 그 세력을 잃고 말았다. 홍건적의 난에 대하여는 김상기 교수님의 「고려시대사 연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명태조 주원장의 고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다. 주원장이 1371년 6월에 고향친구인 탕화와 부우덕 양장군에게 명하여 명옥진의 아들 하왕 명승을 치게하였다는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거니와 그는 이듬해인 1372년 1월에 명승과 먼저 항복을 받은 진우량의 아들 한왕 진리, 그리고 남녀 25명을 고려로 보냈다. 주원장은 포로가 된 하왕 명승과 한왕 진리를 처형하거나 또는 멀리 귀양 보내지 않고 왜 연고도 없는 고려로 그들을 보냈던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진짜 중국사람이라면 그 죄를 용서하여 중국에서 살게 할 것이지, 고려의 장성도 아닌 그들을 고려로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필자가 홍건적 반란을 충실히 살펴본 것은 그들 중 하왕 명옥진과 한왕 진우량은 고려인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내력은 찾아볼 방법이 없다. 그런데 「한국 인명사전」에서 보니 공민왕은 그들을 귀화인이라고 하여 노비와 저택을 하사하여 개경에 살게 하였다. 명승과 진리는 각각 총랑 윤희종의 두 딸과 결혼하여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조선의 태종대왕은 명승을 화촉군(華蜀)에 봉하였고 또 충훈록에 올려 그의 공적을 기리게하였다.「한국인명사전」에서 명승과 진리를 귀화인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들은 귀화인이 아니라 그들이 같은 고려인의 후예였기 때문에 그들을 조국인 고려로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또 한예는 우황초년(1375)에 만주 요동땅에서 도망온 한 사람이 도방(都房)찾아와서 고하기를 명태조는 장차 고려에서 처녀, 수재 그리고 한자(내시) 등 각각 1천명과 준마(좋은말) 1천필을 요구해 올 것이라고 하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이 말은 낭설이 아니라 사실로 드러났다. 명태조 주원장은 1391년 4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말 1만필의 구입과 엄인(환관; 궐내 궁중에서 여러 일을 맡아 보는 내시임) 200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마필 1만 마리는 조공형식인 무상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가겠다는 것이다. 그같이 많은 말을 요구한 것은 전투에 필요해서 구입해 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안다. 그런데 환관 200명을 보내달라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의 풍속으로 환관은 거세한 남자를 말하는 것인데 그 수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고래서인지 고려는 우선 말 1,500필과 약간명의 환관을 보냈다. 그러나 그 후 국내사정과 여러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명태조의 요구사항이 실천되지 못 하였던 것 같다. 한산군 이색이 1389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귀국 인사차 홍무황제를 알현했다. 그때 홍무황제(주원장)는 이색에게 말하기를 "짐에게 아들이 여럿이 있는데 그대의 고려에 좋은 가정의 낭자가 있으며, 데려다가 혼인을 맺도록 하라."라는 유시를 주어 보냈다. 주원장에게는 전후 황후로부터의 10여명의 왕자가 있었다. 홍무황제는 아들들의 배필을 고려에서 데려다가 자부로 삼겠다는 것이다. 목은 이색은 한산이씨로 찬성사 이곡의 아들이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 연경에 가서 과거 급제한 재사이다. 그의 아들 이색은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로서 1391년에 한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명태조 주원장도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정몽주와 이색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던 같다. 그런데 왠일인지 모르지만 주원장이 원하는 결혼문제는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어째든 주원장이 고려인에 대한 호감은 특별하였다. 주원장이 고려인에게 배푼 후의는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고려인들이 요동지방을 드나들면서 중국에 밀무역하는 자가 많았다. 이로 인해서 여명간에 문제가 시끄러웠다. 홍무황제는 고려인이 무단 출입하면서 밀무역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事)에게 전지를 내려 고려인인 중국 경내에 들어와 무역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명하였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주원장이 자부들을 모두 고려에서 데려가겠다고 한 사실과 또 궐내에서 시중드는 환관 200명을 고려조정에서 데려가겠다고 한 일이다. 이는 보통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궐내에 시중드는 환관은 모두 거세된 내시로 그 수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그런데 200명이나 되는 내관을 모두 고려에서 데려가겠다고 하였다니 그의 신변에 위험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주원장은 1368년에 남경에 도읍하여 대명황제의 옥좌에 오른 다음 원의 잔제를 소탕하고 1390년경에는 중국 전토를 통일하여 정국의 안정을 기하였지만 그는 신분문제로 인하여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결론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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