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스프리 노스탤지어
보스톤코리아  2012-05-07, 14:36:56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 통 하나//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 호수의 섬>의 첫 구절이다. 아마도 1980년대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눈에 익은 시가 아닐까. 어떤 문학적 취향을 가진 화장품 업자가 제품 이름으로 쓰는 바람에 다소간 낭만의 손실이 있긴 했지만, 그걸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인 것 같고. 하여튼 30여 년 전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시는 내게 알 수 없는 평온함을 주었다. 어쩌면 내 고향 같은, 그런 느낌. 나뭇가지 엮어 진흙 집, 옥수수와 콩이 무럭무럭 자라는 밭 사이로 꿀벌 통이 몇 있었던 집. 그게 바로 우리집이었다.

뜻하지 않게 학교생활을 짧게 마감하고 고향을 떠난 후, 예이츠의 시는 내게 더 이상의 안식을 주지는 못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기보다 바닥을 치는 시기였으니까 시를 생각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의 망각이 있고나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시가 다시 살아났다. 같은 아일랜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배우면서 불현듯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섬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니스프리 섬으로 가리라, 생각했다. 작가의 말처럼,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그 곳에 이르기까지.” 젊음의 방황이 굳건한 평화로 대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지만 강렬한 희망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니스프리에서 맛보고자 한 평화는 그림자로조차도 오지 않았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겪은 것보다 더 많은 사건들이 그 사이에 내 시간들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성취란 이름의 사이렌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좇아 세상을 유랑했다. 그러나 해가 기울고 세상이 고요해지면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한낮엔 보랏빛 환한 기색//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을 그리워하며 근거 없는 노스탤지어에 괴로워했다.

어느덧 40줄의 마지막 고개에 오른 지금. 이니스프리 호수의 작은 섬을 가보고 싶다는 30여 년 전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아무리 기대가 현실보다 낫다는 세상 이치가 맞는다 하더라도, 나 이니스프리 섬을 가보리라. 더블린 서북쪽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예이츠의 마음의 고향 슬라이고. 섬은 슬라이고 근처의 길 호수에 마치 신이 흘린 하나의 물방울처럼 가볍게 떠있었다. 세상의 많은 어린 심령들에게 낭만과 동경,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심어주었던 이 작은 섬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예쁘고 작고 귀여웠다. 성장기를 잠시 보냈던 예이츠가 식민지 종주국의 수도 런던에서 그리워했던 이니스프리. 잔잔한 호수에 고요히 떠 있는 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어머니의 품속인 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시간의 흐름조차도. 자연으로의 귀속을 꿈꾸며 월든 폰드를 노래했던 써로우가 이니스프리를 보았더라면, 그도 똑같이 노래하지 않았을까.

나라 잃은 시인의 시 한편이 백년 하고도 열 손가락을 접었다 펴야 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글쓴이의 통찰력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의 결핍 때문인가. 아무래도 좋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딘가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무언가가 결핍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돌아가야 할 이니스프리의 섬을 저마다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소리 들리나니//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는” 곳 이니스프리. 작가는 끝내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파리의 어느 병상에서 삶을 마감한다. 우리의 귀환도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핍의 충족이 과거로의 귀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꿈꾸었던 누가복음의 저자처럼,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떤 곳을 향한 노스탤지어를 유전자 속에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게 될 때, 나도 시인 천상병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보스톤 코리아독자 장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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