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향기>에는 여주인공이 없다
보스톤코리아  2012-03-22, 23:28:16 
<편집국에서>

영화 <여인의 향기>에는 여주인공이 없다. 주인공이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멋지게 탱고를 추는 여자는 여주인공이 아니라 우연히 만난 사람에 불과하다. 눈멀고 은퇴한 예비역 중령의 생애 마지막 자살 여행과 친구의 장난을 목격한 죄로 회유와 협박에 부딪친 가난한 사립고등학교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만나 엮는 드라마다.

이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삶의 의미 발견이다. 눈먼 예비역 중령 슬레이드(알파치노 분)는 학생 찰리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발견했고 가족애를 되찾게 된다. 찰리는 회유 협박과 친구를 지켜주는 일 가운데서 갈등하다 진정한 삶의 용기를 찾게 된다.

눈 앞의 현실적인 이익보다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쫓는 사람들은 위대하다. 사회적 지위, 명예 그리고 부 이런 것들에서 멀어지기가 첫사랑과 헤어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일정한 나이가 되고보면 대부분이 인정하게 된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치부한다.

찰리가 다니는 사립고 세명의 학생들은 학교 재단에 아부하며 학생들에게 엄격한 교장을 못마땅히 여겨 장난을 친다. 밤늦게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오던 찰리는 부유층 자재인 윌리스와 함께 이를 목격하게 된다. 윌리스를 구스리기 쉽지 않자 교장은 하버드 대학을 입학 시켜주겠다며 찰리를 회유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징계조치를 내리겠다고 협박한다.

윌리스는 이미 이를 눈치채고 찰리에게 비밀을 끝까지 지킬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동문인 아빠의 권유에 못이겨 윌리스는 친구들의 이름을 털어놓고 눈이 나빠 확실하지 않다며 찰리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다. 찰리는 끝내 밝히길 거부하고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해진다.

찰리를 위해 나선 슬레이드 중령은 “우리는 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 길을 가지 못했다. 옳은 길을 가려는 찰리에게 오히려 벌을 준다면 학교의 교훈는 무너지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슬레이드 중령처럼 옳은 길이 힘들어서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연관된 사건이 민간인 사찰 사건이다.

영화처럼 국가의 민간인 사찰 사건에는 몸통이 없다. 청와대 이영호 고용노사 비서관이 나서서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 부분에 관한한 자신이 몸통”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몸통이라 말하는 몸통은 없는 법이다. 그의 기자회견은 의심만 키웠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자신의 웹사이트에 대통령 비난 동영상을 올렸다가 중견 사업체를 잃고, 검찰의 물샐틈 없는 수사로 인해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잃은 사찰의 피해자와 증거인멸을 지시받고 실행에 옮겼다 실형을 선고받은 장진수 주무관의 고백이 엮는 드라마다.

장진수 주무관이 폭로한 녹취록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검찰이 조율한 흔적이 드러난다. 증거를 인멸한 총리실 산하 공직자윤리지원관실 이인규 국장과 진경락 과장 그리고 장진수 주무관의 형량을 놓고 청와대와 검찰 그리고 법원마저 관계한 정황이 있다.

어느 순간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거기서 멈추고 다 털어놨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추는데 급급하다 보니 너무 많이 나갔다. 수사를 통해 국가차원의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찰도 진실여부를 판단하는 법원도 모두 수사대상이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여서 한 일이 불법 사찰 그리고 증거인멸, 거짓말이라니 정말 영화같다.

수사대상인 검찰이 재수사에 들어갔다.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장관이 증거인멸 당시의 민정수석이니 그 또한 수사대상인 셈이다. 물론 청와대도 수사대상이다. 누가 봐도 수사가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사를 시작한 담당 검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내려왔는가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기회라고 여기면 더 좋겠지만 지금까지 검찰이 보여준 모습은 아니다.

장진수 주무관은 그동안 온갖 회유에 시달렸다. 5-10억을 건네주겠다. 형량을 벌금형으로 해주겠다. 경북도 공무원으로 보내주겠다. 현대에 취직시켜주겠다. 그에게 실제로 건네진 돈도 1억이 넘는다. 5천만원을 받아서 썼다는 그는 정말 어려운 고백임에도 털어놨다. 장진수 주무관은 자백 동기에 대해 “자신의 자녀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가슴에 닿는다.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충분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부모로서 가져야 할 스펙과 부가 충분한 목록이라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진했다.

본능적으로 어렵고 힘든 길을 피하게 된다. 정의는 20대의 일기장에 꽂아둔 책갈피처럼 다시 꺼내들기엔 먼지가 수북히 쌓였다. 삶이 바빠서, 챙겨야 하는 가족이 있어서. 옳은 것들을 애써 무시해 왔다. 검찰로서, 판사로서, 공무원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비겁한 선택에는 감동이 없다. 때론 실수할 수도 있다. ‘스탭이 꼬이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탱고의 기본’이라는 슬레이드 중령의 조언처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옳은 길을 알았지만 너무 힘들어서 택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삶에 주연이 아닌 조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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