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파인만의 아주 특별한 여행 |
보스톤코리아 2012-03-19, 15:09:40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단 여행기는 나왔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혜초와는 다르다. 13세기에 멀리 원나라까지 왔던 마르코 폴로는 24년의 유랑을 마치고 귀국하여 옥중에서 <동방견문록>을 구술했다. 모로코 출신의 이븐 바투타는 30여 년에 걸쳐 아프리카, 유럽, 인도,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주유한 후 <여행기>를 남겼다. 신라의 혜초는 당나라에서 출발하여 인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확실히 선인들에게 여행은 평생을 건 사업이거나 적어도 몇 년에 이르는 장기적인 소명이었다. 오늘날처럼 며칠 동안 주마간산으로, 또는 패키지 상품으로 사진 찍으러 가는 여행과는 달랐다. 기록을 남기는 데 있어서도 선인들은 철저했다. 바투타는 방문지의 풍물과 정치경제적 상황은 물론 자신이 받은 대접에 관해서도 아주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 오늘날의 성찰적 여행기들과 다른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관찰과 묘사의 정교함을 강조한 것은 고전적 여행기로의 귀환이 아닐까 싶다. 하지도 않은 여행에 대해, 가보지도 않은 곳에 대해 여행기를 쓸 수 있을까? 그런 글은 여행기가 아니라 소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기는 바로 <투바가 아니면 죽음을: 리차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이다. 어느 날 파인만은 친구들에게 우표 한 장을 보여준다. 그들은 투바공화국의 우표를 보면서 곧 그곳을 여행하기로 의기투합한다. 호기심이 많았던 파인만은 고등학교 시절 투바의 수도가 키질(Kyzyl)이라는 교사의 말에, 모음이 없이 다섯 개의 자음만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어떻게 발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어학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 후 파인만은 언젠가 투바를 방문하리라 마음먹었고 수 십 년이 지난 후 친구들에게 우표를 보여준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열 명 이내에 든다는 파인만은 MIT를 졸업하고 전무후무한 완벽한 점수로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인슈타인 등의 강의를 듣게 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석함 덕분에 그는 약관 23세의 대학원생으로 무기개발계획인 맨해튼계획에 참여한다. 그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발칙한 천재였다. 노벨상 수상자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쟁쟁한 노학자들 앞에서도 토론이 시작되기만 하면 '그것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상대방을 몰아세우곤 했다고 한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수많은 스토리를 낳았다. 동료들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내는가 하면, 낮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능한 학자로, 밤에는 스트립쇼를 하는 술집의 단골손님으로, 안식년 기간에는 삼바축제에 참여하여 봉고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또 자신의 단골 술집을 위해 법정에서 변호를 하는 정의였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만 먹으면 투바가 아니라 달나라까지도 쉽게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투바로의 여행을 오로지 개인적 노력으로 진행한다. 편법과 편의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더욱 냉전시대였던 1970년대에 미국의 보통사람이 소련을 방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어로 된 몽골어 학습서를 구해 몽골어를 배운 다음 편지를 보내고, 몇 달 몇 년을 기다려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인 답장을 받고, 또 편지를 보낸 후 기약 없는 답장을 기다리며, 지루하고 희망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파인만은 이렇게 몇 년의 준비를 마친 후, 마침내 소련으로부터 비자를 받게 되었다. 자신이 칼텍의 교수라던가, 노벨상 수상자라던가 하는 지위나 권위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직전 이 천재적인 기인에게 암이 찾아왔고, 그는 투바가 아닌 영원한 곳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친구 레이튼이 홀로 투바로 갔고, 책은 그의 아들 랄프 레이튼이 썼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등 주옥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쓴 파인만은 과연 명불허전이란 말 그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지적 천재성과 샘솟는 호기심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편법과 권위를 거부하는 삶에 대한 숭고한 태도로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 않을까? 목적지는 정해졌지만, 사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그 곳을 향한 여정.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망자(亡子)의 관에 여비를 넣어주기도 하지만, 그가 그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파인만처럼 갈 수 없는 여행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땀을 흘리고, 시행착오를 겪고, 좌절하고, 그렇지만 편법을 쓰지 않으면서 도전한다. 장영준 (보스톤코리아 신문 독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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