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26. 나라현 백제사( 百濟寺)
보스톤코리아  2012-02-06, 11:16:39 
7세기 때 일본 열도 인구는 80% 이상이 한반도 도래인들이었는데 백제계 도래인들이 제일 많았다. 그들에게 백제는 가슴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제를 “큰나라”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점차 변해서 “구다라”가 되었다.

고대 일본은 거의 모든 것을 백제로부터 배웠다. 백제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물건들은 새롭고도 귀한 것들이었다. 성덕태자 시절에는 이들 수입품을 “하쿠라이”( 舶來), 즉 바다를 건너온 최상급품 이라고 불렀거나 “구다라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백화점에서 “구다라이”하면 최상품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구다라이네”는 백제 물건이 아니다, 즉 최상급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현재 일본에는 지명, 강, 다리, 학교, 등에 구다라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의식적으로 구다라라는 이름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기 522년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 나서는 사방에 “구다라”라고 부르는 사찰들이 생겨났는데, 어떤 사찰은 처음부터 백제사 (하쿠사이지) 라고 명명한 절도 있었다. 현재 일본에는 모두 5개의 백제사가 남아 있다. 백제사(百濟寺 )만 있는 게 아니다. 신라사, 신라 신사, 카라쿠니신사라고 부르는 신라계 사찰이나 신사는 10개가 넘는다. 이들 사찰과 신사들은 통일신라때 생겼거나 일본 개국초기에 개국신화의 주신(主神)들이 신라신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라현(奈良縣)의 백제대사(百濟大寺 )>에 얽힌이야기
일본 30대 비다쓰( 敏達) 천황은 일본 왕실 족보, 신찬 성씨록에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그는 서기 572년에 지금 나라현의 백제강터에 백제궁을 짓기 시작해서 그 다음 스이코 천황 때에 완성했다고한다.
비다쓰 천황의 손자 34대 서명( 舒明 ) 천황은 11년 7월에 백제천 서쪽의 백성들은 백제 대궁을 짓고, 동쪽의 백성들은 백제대사를 건축하게 하였다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지금의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광릉정( 廣陵町) 이다.

지금은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제대사터만 발굴하여 확인하였고 인근 백제사 공원에 백제사 3 중탑만 남아있다. 원래의 백제대사(百濟大寺 )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39대 천무천황(天武大寺)이 근강( 近江)에서 나라로 천도하면서 백제대사 역시 나라로 옮겨왔는데 백제라는 이름을 빼고 대안사(大安寺 )로 바꿔 버렸다. 현재 나라시 대안사정(大安寺町천지)에 있는 대안사다. 천무천황은 백제대사를 창건한 서명 천황의 아들이다.

서명천황은 모든 것에 백제라는 이름을 부쳤는데 천무천황이 백제라는 이름을 빼고 대안사로 이름을 바꾼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서명천황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이 천지천황(天智天皇)이고 작은 아들이 천무천황(天武天皇 )이다. 분명한 것은 둘이 형제간이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아닌 것 같다.

천황이 되려고 전쟁까지도 사양하지 않았던 모진 사람들이었다. 천지천황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부왕 서명천황이사망하고 그의 모친이 황극천황으로 대를 이었을 때 소가노이루카 대신의 전횡이 몹시 심하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중대형(中大兄) 황자는 소가노이루카가 방심한 때를 틈타 그를 제거해 버리며 100여년에 걸친 소가 씨 세력을 단숨에 제거해 버린 사람이다.

이 중대형 황자가 후일에 천지천황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는 3만명의 백제부흥군을 백제로보냈지만 기벌포(금강입구) 싸움에서 거의 전멸당하는 아픔도 겪어야 하였다. 이어서 부흥군 최후의 거점 주유성( 州柔城 )이 함락되자 왜국인들이“주유(州柔)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할만큼 그는 백제에 대한 애증이 남달랐던 사람이었다. 패망 백제 유량민들이 넘쳐나자, 수천명을 근강(近江) 에 토지를 주어 정착하게 하였고 3년 동안 식량을 대주었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 )을 오오사카에 정착시키고 백제부흥군 복신 (福信 )의 아들 귀실집사를 비롯한 70여명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백제 난민들을 위한 그의 행적으로 그는 나라(奈良) 도성에서 많은 원망을 듣게 된다. 또 그는 정적들을 가차없이 처단했기 때문에 도성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는 그를 지지하는 백제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근강(近江)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때 그의 부왕 서명천황이 세운 백제대사도 옮겨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가 다음 왕위계승을 동생 오샤마( 大海 人 )를 제쳐 놓고 그의 아들 오오토모(大友)에게 넘겨 주려 하자 오샤마 황자가 임신( 壬申)년에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니 그가 39대 천무( 天武 )천황이다. 그는 도읍을 다시 나라로 옮기면서 백제대사 역시 나라로 옮기는데 백제대사의 이름을 대안사(大安寺 )로 바꿔 버렸다. 그 이유는 나라지방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반백제( 反百濟) 정서를 감안한 것이 이유라고 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 문정창( 文定昌 ) 씨는 천무천황이 친신라계왕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천지천황때는 신라와 왕래한 것이 고작 네번뿐인데 천무천황 때는 무려 15번이나 왕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무천황 이후로 그의 자손들이 쇼토쿠 천황때까지 천황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천지천황의 자손인 광인( 光人), 간무(檀武 ), 천황으로 이어진다.

교토에 있는 천용사( 泉涌寺)에는 천지천황 이후에 나오는 천황들을 모시고 있는데 이상한 점은 천무천황을 비롯한 천무천황계의 천황들이 모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사학자들은 천무천황이 일본왕가의 전통혈맥인 백제계가 아니기 때문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고있다. 그들은 천무천황의 모친이 신라계 여인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현 일본 왕가는 백제 무령왕의 동생 게이타이 천황을 시조로 모시고 그의 피를 물려 받는 천지천황, 간무 천황을 중시조로 모셔 오고 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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