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 스코츠보로 소년들 재판 (1931): 속죄양이 필요한 사회
보스톤코리아  2011-10-24, 13:10:18 
1930년대 대공황기의 보수적 앨라배마의 어느 가상 마을, 변호사 아티쿠스 핀치 (Atticus Finch)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Tom Robinson)의 변론를 담당하게 된다. 톰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인해 존경받던 변호사가 하루 아침에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아티쿠스는 결국 톰의 무고함을 입증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백인들만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은 톰에게 유죄라는 판결을 내린다.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톰은 탈주를 시도하다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퓰리쳐상 수상작이자, 한국에서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던 하퍼 리 (Harper Lee)의 To Kill a Mockingbird는 오랫동안 청소년들의 교양 필독서로서 그리고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 진 동명 영화 (앨러배마에서 생긴 일)로 사랑을 받았다. 이 소설 속에는 다양한 코드가 숨어있지만,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메세지 한 가지를 꼽자면 인종 차별주의와 군중심리에 대한 고발이다.

죄 없는 톰에게 강간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소설의 화자이자 핀치의 어린 딸로 등장하는 어린 소녀 진의 시선에서 사건과 주변을 배회하다 양심과 정의를 다시 돌아보고, 소설 속의 불의에 분노한다. 극남부 (Deep South) 주 중의 하나인 앨라배마의 인종 편견에도 분노한다.

많은 소설이 그러하겠으나 To Kill a Mockingbird 의 가치는 작품이 기댄 리얼리티를 경유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에 실제로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1931년, 테네시에서 앨라배마로 향하던 화물열차 안에서 백인 여성 두 명을 윤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아홉 명의 십대 흑인 청소년들이 체포되었다. 실상은 열차에서 벌어진 백인 청년들과의 패싸움이 강간 사건으로 호도된 사건이었다. 앨라배마주는 이들에게 최고형을 내려야한다는 여론으로 들끓었다.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모든 무죄의 증거를 무시하고 기소된 아홉 명 중 여덞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심지어 <피해자>로 지목된 여성들이 강간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였음에도 법원은 이 소년들에게 전기 충격의자 사형을 언도했다.

참고로 1860년대 남북 전쟁과 재건기를 거쳐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노예였던 흑인들도 시민권과 투표권을 (명목상으로는) 가지게 되었지만, 1930년대에도 여전히 남부 각 주에는 흑, 백간 인종 분리와 실제적 차별을 법으로 못박아 둔 짐 크로우 법이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서의 투표 조차 투표세 (Poll Tax), 문맹 테스트 (Literacy Test), 복잡한 선거 등록 절차 등에 의해 겹겹이 가로막혀있었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어쨌거나 미국 공산당이 변론을 자처하면서, 이 날조 재판에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주의가 개입되어 있음을 고발하고, 전미 유색인종 인권 향상 위원회와 함께 무죄 석방 운동을 벌이게 되면서 이 사건은 전국적 인종차별주의 반대 캠페인의 도화선이된다. 한편, 피고인 중 패터슨(Haywood Patterson)과 노리스(Clarence Norris)는 각각 “스코츠보로 소년들” 재판이 흑인 배심원을 배제하고 변론의 기회를 박탈하는 등 적법절차 (Due Process) 요건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앨라배마 법원은 이 소송을 기각하였지만, 찰스 에반스 휴즈의 대법원은 하급법원의 판결을 깨고 노리스와 패터슨의 소송 제기가 정당하다고 손을 들어준다. 비록 스코츠보로 소년들이 모두 누명을 벗는 데는 4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연방 대법원 차원에서는 서서히 짐 크로우 법에 대한 균열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
지난 달 말, 조지아주의 잭슨 교도소에서 1989년 한 경찰관을 총기로 살해했다는 혐의로 20년 넘게 복역하면서 “나는 당시 권총조차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며 일관되게 결백을 주장하던 흑인 남성 트로이 데이비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데이비스 사건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고, 데이비스를 진범으로 지목했던 목격자들 대부분이 진술을 번복했던 터라 법정 공방과, 진범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이루어진 사형이었다. 어쨌거나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카터 전 대통령, 교황 베데틱트 16세 등이 앞장서 전개했던 데이비스 구명 운동은 실패했지만, 데이비스 사형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물론 반인륜적인 범죄라든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 범죄 사건을 접할 때면 “살려둘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곤 한다. 하지만 과연 사회는 개인의 목숨을 거둘 권리가 있을까? 그 답이 무엇이 될 것이건 간에 진지한 윤리학적 성찰이 필요할 듯 싶다.
한마디만 더. 사실 “흑인 남성이 백인여성에게”로 시작하는, 그리고 불충분한 증거로도 기소된 피고가 중벌을 받게 되는 스코츠보로 사건과 유사한 플롯의 사건들은 당시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고 한다. 1930년 무렵, 대공황이 할퀴고 간 미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사실 (흑인들이 대체로 더 높은 실업률과 더 극심한 빈곤으로 시달렸지만) 흑백을 가리지 않고 팍팍했다. 흑인이라는 사회적 타자들은, 인종주의의 장막을 통해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분노의 화살이 공황을 야기한 정치와 기업문화로 향하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속죄양 (Scapegoat) 구실을 했던 것이다.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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