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25) :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7-1) |
보스톤코리아 2011-03-21, 15:41:24 |
일본에서 관찰해 본 중국의 변화
최근 중국의 호금도(후진타오)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을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으로 지칭하는G2(Group of Two)라는 신조어가 서방세계에서 회자되다시피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존재감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30년간 지속돼온 중국경제의 고도성장, 2010년에는 GDP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앞질러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될 거라는 예측도 많이 나오고 있다.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액, 미국 국채의 최대 구입자 등 수치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부상(浮上)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 글에서는 이런 거대한 수치상의 중국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의 모습과 변화를 20여년간 외국에서 거주하면서 관찰해본대로 적어보겠다. 1976년에 중국에서 모택동의 부인 강청을 비롯한 소위 ‘4인방’이 제거되고 문화대혁명이 정식으로 종결됐을 때 중국의 국고가 완전히 바닥이 낮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경제나 사회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던 것이다. 1970년대 말기부터 등소평이 주창한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우선 사회주의 집단농장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개인영농을 허락하면서 농민들의 노동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농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다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개인장사가 허락되고, 해외화교나 외국인을 상대로 한 외자유치정책이 실시되어 중국에서 개인장사붐, 외자유치붐이 일어났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한 1988년이 바로 이런 시점이었다. 내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했을 그 당시, 중국사회가 개혁개방정책으로 많이 봐뀌어간다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했지만 가까운 장래에 일본을 초과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때는 일본경제가 한창 버불의 절정기에 있었고, 국제사회가 일본을 보는 눈도 대단히 좋았다. 그러다가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사건이 터졌는데 일본의 대다수 중국전문가들이 이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실패하고 다시 농업국으로 회귀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의 슈퍼나 옷가게에 가면 되면 중국제 복장이 눈에 많이 띄어 중국의 성장이 결코 멈춰서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슈퍼에 가봤더니 중국제 청바지가 있어 중국도 청바지를 만드는 나라냐고 깜짝 놀랐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그 때이다. 그러다가 1992년에 일본유학 4년만에 중국을 방문했는데 중국출신인 나로서도 중국인들의 마인드가 너무나도 바뀐 점에 놀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돈 얘기를 하고, 사람들 사이의 인사가 돈 잘 버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중국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으로 돈벌이 나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1989년의 천안문사건이 중국인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이 사건 이전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이 아직 깊이 남아있었고 정치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인들 의식속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꺼져가고 경제일변도로 바뀐 것 같아 보였다. 그 다음에도 90년대에 중국을 몇차려 방문했는데 가 볼 때마다 많이 바뀌고 있었고, 사회전체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 때부터 농민들이 농촌을 많이 떠나고 농촌에 폐가가 생기고 자식들이 떠난 마을에서 노인들이 고독하게 집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값싼 중국제품이 넘쳐날 정도로 많아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불렀다. 2001년에는 기회가 있어 할빈, 장춘, 연변, 내몽골, 북경을 방문했는데 중국의 도로사정이 획기적으로 좋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중국의 주요도시 구간에는 도속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일본못지 않게 보급돼간 것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북경에서 놀라웠던 것은 가는데마다 주택융자를 해준다는 광고판이 나붙어있어 중국의 도시에서 마이홈시대의 열기를 실감했다. 일본과 한국의 고도성장기가 바로 이런 식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북경에서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나갔는데 호텔보이가 잡아준 택시가 알고보니 정부기관의 공용차였다. 정부기관의 공용차 기사가 새벽에 일어나서 공용차로 택시운전을 하고 그리고나서 아침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는 중국의 공무원들도 부업을 많이 하는 시기여서 합법이던 아니던간에 그런 식으로 수입을 늘려가고 있었다. 김광림 Professor, Niigata Sangyo University Visiting Scholar, 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Harvard Univesity E-mail:[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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