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시 읽는 미국사 : 뉘른베르크 재판을 돌아보다 |
보스톤코리아 2010-11-15, 15:25:40 |
2차 대전 종전 후 몇 달이 흐른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에서 역사상 최초의 국제 전범재판이 시작되었다. 연합국의 대표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이 주도하였던 이 재판은 전쟁범죄, 반평화범죄, 반인류 범죄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국제 협약에 따른 것으로, 나치 독일 고위전범들에 대한 1차 재판 (1945~1945)과,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생체실험 핵심인사에 대한 2차 재판(1946~1949)으로 이어진다.
뉘른베르크 2차 재판과 제노사이드 여기서 고위 전범들을 국제 법정이 기소, 처벌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홀로코스트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처결이다. “국가가 자국민을 대우하는 방식이 국제적 관심을 요하는 문제이며 국제 기준의 적용을 받는다”고 최초로 적시한 1948 년의 U.N. 세계 인권 선언이 뉘른베르크 재판을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뉘른베르크 2차 재판의 결과로 뉘른베르크 강령이 채택되면서부터 인체 연구에 관한 “생명 의료 윤리”가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뉘른베르크 법정은 나치가 유태인에게 집단적으로 자행했던 잔혹행위와 인체 실험 등을 인류가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로도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인권유린이자 제노사이드 (Genocide)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고 판단했다. 1948년 제네바 협약의 정의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특정한 인종, 민족, 국가, 종교 혹은 문화의 일부 혹은 전부를 소멸시키려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참고로 뉘른베르크 법정이나 이후의 공식 역사가 소홀히 다루긴 하지만 나치 독일 하에서는 유태인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혹은 집시도 제노사이드의 대상이었고 봐야한다. 나치 독일과 생명의료 윤리 나치 독일의 행위가 “제노사이드”에 해당된다고 보는 데에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잔혹하고 반인륜적 인체 실험을 대규모로 자행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제노사이드 규정 여부를 떠나서라도 (일본의 731부대에서의 마루타 실험과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에서의 생체 실험은 감압실험, 냉동실험, 인위적 샴쌍둥이실험, 전염병실험, 독 실험, 안락사 실험, 불임 실험 등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를 대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실험들로 악명이 높다. 물론 당시의 실험이 현재의 의학 지식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다. 하지만 설령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복지 증진에 도움이 되는 연구라고 할지라도 피험자의 의사에 반하거나, 피험자에게 위해할수 있는 실험, 혹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을 명시하지 못하는 실험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찾기는 힘들다. 나치의 대량학살에는 열등한 유전적 소인을 가진 인구의 증가를 억제함으로써 인류의 “품종개량”을 꾀했던 우생학도 일조했다. 2차대전당시 히틀러는 유태인이나 집시등에 대해서 “가장 탁월한 민족인 순수 아리아인의 혈통을 더럽히는” 집단으로 규정했었기때문이다. 뉘른베르크 법정에서는 생체 실험과 가스실 학살 등에 앞장섰던 의사와 과학자, 의료 행정가 등에게도 무기징역과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국제 사회는 나치 우생학을 강력히 비판했다. 물론 이 모든 재판과 강령 채택, 그리고 나치 독일의 잔혹행위에 대한 거센 비판의 과정에서 정의로운 미국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홀로코스트 산업과 린치버그 이야기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나치 독일만의 흘러간 역사 혹은 제노사이드의 유일한 사례로 취급하기엔 불편한 사실들이 많다. 가령 자신의 부모가 바로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과 같은 책들은, 피해자 위치를 혹은 정의롭게 피해자를 지원하는 위치를 가장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입장은 사실상 또다른 홀로코스트의 가해자의 입장이며, 유태자본의 현재 범죄행위를 덮는 데에 홀로코스트의 역사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가스실 대학살이나 생체실험에 “선동”된 과학이었던 나치 우생학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192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각 주정부차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유전적 소인을 가진”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수술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나치가 유태인이나 집시를 희생양으로 삼았듯, 미국에서 “정신적 문제”라는 이유로 어린나이에 강제 불임시술을 당했던 이들은 대체로 당시 저소득층이었던 남유럽계와 독일계 이민자 집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다큐멘터리 <린치버그 스토리>가 보여주듯, 나치 독일의 우생학을 맹렬히 비난했던 미국이, 전범재판 훨씬 후인 1972년까지도 이 강제 불임 시술 프로그램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알라바마의 저소득층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이른바 “치료하지 않은 매독”의 결과를 관찰했던 터스키기 연구가 페닌실린이 개발되고도 한참 뒤인 1973년에서야 중단이 되었던 것도 미국이었다.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무책임한 냉소를 던지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한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일어나서는 안되었던 비극들을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는 일련의 노력조차 그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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