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한일전, 정현욱은 '숨은 영웅'
보스톤코리아  2009-03-11, 23:15:17 
일본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정현욱
일본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정현욱
야구계에는 오래도록 통용되는 속설 하나가 있다.

이른바 '위기 뒤 찬스'라는 말이다. 큰 위기를 넘긴 팀은 곧 좋은 찬스를 잡고 좋은 찬스를 놓친 팀은 곧 큰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도 확인된 바도 없는 얘기지만 이상하게도 이 속설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잘 들어맞는다. 거의 70% 이상 맞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래서 야구는 흐름의 경기라고들 한다. 흐름을 탔을 때 점수를 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상대팀에 승기를 뺏긴다.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2기 한국야구대표팀이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아시아지역예선 그룹A조 1위로 본선진출을 이뤘다. 예선전의 정점은 한국과 일본의 리턴매치가 벌어진 9일의 순위결정전이었다.

한국은 지난 승자전 2:14의 콜드게임 수모를 깨끗이 씻는 1:0 짜릿한 완봉승으로 3승1패, 조 1위를 차지했다. 승리의 주역은 선발투수 봉중근과 결승타의 주인공 김태균이다.

또 하나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될 선수가 있다. 봉중근에 이어 등판, 일본 쪽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미친 듯한 강속구로 잘 지켜낸 '무명의 반란' 정현욱이었다.

정현욱이 빛난 이유

숨 막히는 투수전이었다. 3회까지 일본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에 퍼펙트로 눌리던 한국은 4회 이종욱, 정근우의 연속출루에 이은 4번 타자 김태균의 총알 같은 3루 선상 좌측 적시타로 선취점을 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1점이 결승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승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한국은 주도권을 잡았다. 4회초와 5회초 좋은 찬스를 견제사와 더블플레이로 무산시키며 추가점을 얻어야 할 때 얻지 못해 흐름을 내주는 듯 했으나 그 때마다 봉중근의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이 빛을 발했다.

봉중근은 6회말 선두타자 이치로 스즈키까지 잘 막고 마운드를 정현욱에게 넘겼다. 바로 이 때 한국의 숨은 영웅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7회초 한국은 선두 김현수의 볼넷과 김태균의 좌중간 2루타로 무사2,3루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추가득점 찬스를 잡았다. 정말 뭘 해도 점수를 뽑는다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런데 이대호의 유격수 땅볼이 나왔고 타구는 전진 수비하던 일본의 나카지마 히로유키 손에 들어갔다.

김현수-김태균의 어이없는 주루플레이가 더블아웃으로 이어졌고 금세 상황은 2사1루로 바뀌어있었다. 한국벤치는 망연자실했고 기대했던 추가득점은 물 건너갔다.

한국야구 팬들은 위기 뒤 찬스라는 무서운 속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거친 반격이 예상되던 바로 이 순간 한국에는 정현욱이라는 복병이 숨어있었다.

경기흐름상 최대고비 처였던 7회말 정현욱은 5번 이바타 마쓰노리 헛스윙삼진, 6번 대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헛스윙삼진, 7번 후쿠도메 고스케 1루 내야안타 후 8번 조지마 겐지를 우익수플라이로 처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닝을 넘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상은 정반대다. 경기 최대의 승부처였다. 정현욱의 구위가 워낙 대단해 일본이 손 한 번 못 써보고 흐름을 날려버린 것이다. 정현욱에 막힌 일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정현욱, 그는 누구인가?

정현욱은 1978년생 우완투수다. 지난 1996년 당시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언스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고통의 무명생활이 10년 가까이 이어졌고 2004년에는 병역비리에 연루돼 2005년 잠시 글러브를 벗고 입대했다. 2007년 8월 제대한 정현욱은 마음을 다잡고 맞은 2008시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

지난해 53경기에 등판, 127이닝, 10승4패, 11홀드, 평균자책점(ERA) 3.40 등을 기록, 일약 삼성 불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프로데뷔 후 12년 만에 이룬 값진 성과였다. 삼성 팬들은 정현욱을 두고 '정노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불펜투수로 툭 하면 나와 엄청나게 많은 공을 던져댔다.

2008년 삼성경기에는 언제나 정현욱이 함께 했다. 심지어 삼성경기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틀면 정현욱이 나와 있더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등장했다. 그만큼 삼성이 믿었다는 증거였고 또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 잘 해줬다는 훈장 같은 별명이다.

WBC 한국야구대표팀 최종엔트리 28인의 명단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제치고 정현욱이 떡하니 올라있었다. 팬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메이저리그 물을 먹은 김병현이 돌아오면 탈락할 첫 번째 후보가 정현욱이라고 수군거렸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여권분실 소동을 벌인 김병현이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고 그렇게 정현욱에게 기회가 찾아들었다.

일본 도쿄에 입성한 대표팀 투수 중 정현욱의 구위가 가장 좋았다는 후문이다.

김인식 대표팀 감독이 다른 스타급 투수들을 다 제쳐두고 봉중근 다음의 필승카드 1순위로 정현욱을 뽑아든 이유다. 만약 정현욱이 업었다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일본전의 정현욱은 최고 150km의 강속구를 뿌려댔다. 여기에 볼 끝은 포수미트를 뚫고 지나갈 듯 꿈틀꿈틀 살아 들어갔다. 간간히 특유의 폭포수 커브가 섞이자 일본의 내로라하는 타자들은 연신 헛방망이질 해대기 바빴다. 천문학적인 몸값을 자랑하는 일본타자들 배트가 도무지 정현욱의 강속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줄기차게 패스트볼(빠른공)만 던져대도 마찬가지였다. 힘으로 일본의 콧대를 완전히 찍어 누른 것이다.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통쾌함이 절로 묻어나는 장면이었다.

한국야구에 정현욱이라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한 때 자칫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야구공을 놓을 뻔 했던 무명의 선수가 큰 아픔을 딛고 돌아와 국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정재호 기자, kemp@uko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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