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 인디언의 역사 : 4.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경쟁 (3) |
보스톤코리아 2015-08-03, 12:06:40 |
남동부지역 원주민과 유럽 정착민과의 갈등 (계속)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서는 1715년부터 1717년까지 야마시(Yamasee)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 전쟁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야마시 족을 비롯한 미국 인디언 부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써 전쟁에 참가한 인디언 부족은 야마시 족 외에 크리크 족, 체로키 족, 치카소 족, 카토바 족, 애팔라치 족, 애팔라치코라 족, 유치 족, 사바나 강 쇼니 족, 콘가리 족, 웩스호 족, 피디 족, 케이프 페어 족, 체로 족 등 다른 많은 부족들이 참가했다. 이 전쟁으로 1715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의 생존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1716년에는 체로키 족이 사우스캐롤라이나 편으로 돌아서서 크리크 족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다른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같은 편에 서서 영국 정착민을 상대로 싸우던 체로키 부족은 전쟁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영국 편으로 돌아 섰는데 영국 측으로서는 체로키의 변심이 전쟁의 승기를 잡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야마시 전쟁은 미국 식민지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이라는 ‘필립 왕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었으며, 전쟁에 가담한 인디언 부족들도 부족별로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들 중에는 유럽인들에 의한 토지 잠식, 무역상들의 횡포, 인디언 노예무역, 사슴의 고갈, 부유해지는 유럽 출신 개척민들과는 대조적으로 더 가난해지고 있는 인디언들, 쌀 재배면적의 확대, 영국과의 무역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루이지애나에서의 프랑스인들의 영향력, 스페인령 플로리다와 오랫동안 유지해온 인디언 동맹, 인디언 부족 사이의 권력 투쟁, 점점 긴밀해져가는 부족 간 의사소통 등이 있었다. 세위(Sewee) 부족의 비극 영국인 탐험가 로슨(John Lawson)은 1709년 런던에서 ‘A New Voyage to Carolina’를 발행하였다. 그는 1700년 말부터 1709년에 런던으로 돌아갈 때까지 캐롤라이나 내륙 깊숙이 탐험하여 두 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곳에서 고위 공직을 직접 맡아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들은 매우 슬픈 인디언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산티 강어귀에 살고 있던 세위 인디언 부족은 유럽인들과 모피 등을 교역해 왔는데, 어느 날 그들은 그들이 헐값에 넘기고 있는 모피가 유럽에서는 몇 십 배의 가격으로 팔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모피를 캐롤라이나에서 모피 중개상에게 팔지 않고 유럽으로 가서 직접 팔게 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은밀히 대형 카누를 만들어 유럽의 배들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대서양 바다를 나섰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진 카누도 먼 바다의 파도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터이고 아마도 허리케인이 자주 발생하는 시기에 떠났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 조난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바다에 빠져 사망하였는데, 더욱 불행스러웠던 것은 일부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선박에 의하여 가까스로 구조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서인도제도로 노예로 팔렸다. 캐롤라이나에 남아있던 많지 않은 세위족들도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다른 부족으로 흡수됨으로써 세위족의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노예 사냥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경제적 기반은 담배농업, 벼 재배, 모피 교역 등이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원주민을 잡아서 노예시장에 내다 파는 사업 또한 크게 성행하였다. 사탕수수 등을 생산하는 재식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던 서인도제도에서 특히 노예 수요가 많았으며 캐롤라이나 남부지역에서 쌀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됨에 따라 노동집약적인 벼농사의 특성상 많은 노예가 필요하게 되었다. 백인 노예 사냥꾼의 앞잡이 역할을 담당한 일부 인디언 부족은 다른 약한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로 잡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노예 사냥 초기에는 해안가에서 이루어졌으나, 점차 자원이 고갈되면서 내륙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인디언들을 노예로 잡아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캐롤라이나 식민지 총독이자 노예 무역상이던 무어(James Moore)는 1704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플로리다를 침략하여 한꺼번에 6000명 이상의 인디언을 포로로 잡아와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1730년쯤부터는 더 이상의 인디언 노예공급이 어려워지자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그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 때부터 노동집약적인 농업이 중심이 된 남부 지역에서는 흑인 노예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특히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경우가 심해서 1860년의 통계에 의하면 백인 인구는 29만 명이었던 반면 흑인은 41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경쟁으로 갈라선 원주민들 프랑스도 영국과 비슷한 시기인 1600년대 초부터 북미 대륙에 식민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영국이 보스톤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 지역부터 개척해서 북쪽과 서쪽으로 식민지 영역을 확장해 나간 반면에 프랑스는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로부터 시작하여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진출하여 오대호에 이르렀고 다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하하여 멕시코 만까지 이르게 되었다. 유럽의 두 열강이 동시에 영역확장을 추진하다 보니 양측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분쟁은 주로 양 세력이 부딪쳤던 메인 주, 뉴욕 주 북부, 오대호 인근과 펜실베이니아 및 버지니아 서부에서 발생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철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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