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54
보스톤코리아  2014-11-10, 11:40:42 
다섯째로는 격구擊毬다. 먼저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을 옮기기 전에 일반적인 격구에 대해서 먼저 고찰해 보기로 한다. 격구라 함은 보통 ‘마상격구’를 가르키며, 이 마상격구는 현대의 폴로(Polo)와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격구는 중국을 통해서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고 보고 있다.86)  마상격구는 페르시아 지방(현 이란)에서 발생하였으며 서양으로 전해진 유희는 현대의 폴로로 발전하였고, 동양으로 전해진 그것은 격구로 발전되었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시작된 격구는 중국의 서장(티벳트) 및 인도를 거쳐 당나라에 전래되어서 ‘격구擊毬’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그때 우리나라의 고구려와 신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와 후삼국 시대에도 격구놀이는 성행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왕으로부터 서민들에게 이르기까지 몇 가지 변형된 유형으로 발전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즐긴 무예이자 오락이었다. 

격구는 타구打毬, 격구희擊毬戱, 농장희弄杖戱, 격봉擊棒, 봉구棒球, 봉희棒戱, 또는 공치기, 장치기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상격구 뿐만 아니라 보격구步擊毬도 대단히 성행했는데 보격구는 궁중의 아녀자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널리 전파되어 즐기곤 하였다. 보행격구는 격방 또는 장시라고도 불리었다. 이 보행격구는 현대의 골프(격방, 타구, 봉희), 필드하키(장시, 장구) 또는 축구와도 비슷한 유희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하였다는 사실史實은 김춘추가 장가든 사실만 부각되어 무예나 유희면을 소홀하기 쉬운 장면이지만 이 내용이 마상이었는지 보행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격구와 유사한 놀이를 한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유득공이 쓴 ‘발해고渤海考’에 따르면 발해의 왕문구王文矩 일행이 889년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일왕이 보는 앞에서 격구를 시범했다는 기록은 당시 발해에서 격구가 대단히 성행했으며, 발해가 일본에 격구를 전파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후삼국시대에도 격구가 유행했음이 고려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이 즉위한 해 9월에 상주의 적사 아자개(아자익)가 사자를 보내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그를 맞이하는 의식을 구정毬庭87) 에서 행하였다. 또한 태조2년에 아자개 일행의 환영식을 격구장에서 했다. 이 같은 기록들로 볼 때 후삼국시대에 격구가 무사들이나 귀족들 가운대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습무習武나 유희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창건과 함께 왕궁에 격구 전용구장이 있었음은 왕건이 격구를 잘하고 좋아하였으며 당시의 격구의 성행을 미루어 짐작케한다. 그 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들을 보면 왕들과 왕족 그리고 귀족과 무사들이 격구를 즐겼다. 특히 의종은 일반 무술뿐만 아니라 격구에도 능숙했으며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는 무관들의 무예를 연마하는 군사적인 목적외에도 격렬한 유희적 마상놀이로 대단히 성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엽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일반 백성들에게도 전파되어 전국적인 행사로 단오절에는 왕이 참관하는 대규모의 격구대회도 열였다.88)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여전히 격구는 성행하였다.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바뀌어도 무인이며 격구의 달인이었던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격구의 호응도는 한층 더 높았다. 또한 그의 아들 이방원(3대왕 태종)과 조선을 건국한 중추세력들이 모두 즐겼던 유희였고 습무였기에 격구는 더 유행하였고 격구술은 더욱 발전되었다. 세종때에는 격구의 무예성을 중시하여 무과의 전시과목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무과 응시자뿐만 아니라 문무고관은 물론 많은 백성들이 즐겼기에 일부 염려하는 신하들이 격구경기의 사치성을 이유로 이를 국법으로 금지하자는 의견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임금 세종은 “격구는 본시 무예를 연습하기 위함이요, 노는 것이 아니다. 무예를 연습하는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일부 신하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또한 “병조에 아뢰기를 고제를 삼가 살피니 당의 격환을 곧 황제가 만든 축국의 유제이다. 그런 이유는 다 놀이로써 무예연습을 하는 것이다. 격구를 잘하면 말도 잘타고 창도 잘 쓴다. 이제 부터 무과에서 격구로써 시험을 보아 인제를 뽑으라” 하였다. 실로 세종대왕의 치세에는 격구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으뜸가는 신하들과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였다. 다음에는 최초의 한글 서사시/악장 용비어천가 속의 격구를 따라가 본다. 

86)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87) 왕궁내에 있었던 격구 전용구장   
88) 조선왕조실록(태조1권, 영인본 1책4면)에 보면 고려 공민왕5년(1356년)에 태조 이성계가 22살에 관직에 처음 나간 내용과 격구하는 방법과 그 장면, 가장 으뜸인 이성계의 격구 실력과 그 활약상, 백성들의 호응도 등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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