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특 선우의 흉노 전성기 |
보스톤코리아 2014-11-05, 11:13:01 |
2014-09-12 묵특 선우, 아틸라, 징기스칸, 티무르 이들 4명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흉노의 영웅들이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거대한 초원제국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었다. 묵특은 최초로 흉노 제국을 건국한 영웅이었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의 부왕 두만(頭曼) 선우(單于)때 중국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던 때(BC 221)로 그는 몽염 장군에게 30만 군사를 주어 황하 상류 하투지역(지금의 오르도스)에 살고 있던 흉노족을 몰아내 버렸다(BC215). 이때 흉노는 흥망의 기로에 처했으니 동쪽의 강성한 동호(東胡)는 아예 흉노를 무시했고, 서쪽의 월지(月氏)는 흉노로부터 하서주랑을 빼앗아가고도 부족하여 볼모를 보내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북쪽의 정령(丁零: 지금의 돌궐)이 계속 침공해오고 남쪽에서는 막강한 진나라 몽염 장군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 당시의 상황을 사마천 사기(史記) 흉노 열전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우에게 묵특(冒頓)이라는 태자(太子)가 있었다. 두만 선우와 알지(閼氏: 왕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묵특을 폐위하고 작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여, 묵특을 월지국에 인질로 보냈다. 두만선우는 묵특을 죽이려고 묵특이 월지국에 인질이 되어 있는데도 월지국을 공격하였다. 월지국으로 하여금 묵특을 죽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월지가 묵특을 죽이려고 하자 묵특이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두만선우는 그것을 장하게 여겨 만기(萬騎)의 장수를 삼았다. 묵특은 이에 명적(鳴鏑: 소리나는 활)을 만들어 기병들에게 활쏘기를 익히도록 하며 명령하기를 명적이 맞히는 것을 쏘지 않는 자는 참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주저하며 활을 쏘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어 묵특은 그들을 참하였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알지(처)를 쏘았는데, 역시 활을 쏘지 않는 병사들을 죽였다. 얼마 뒤에 사냥을 나갔다가 아버지 두만의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이번에는 부하들이 모두 말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그는 마침내 두만선우를 제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두만과 함께 나갔다가 두만을 향해 명적을 날리자 모든 병사들이 활을 쏘아 두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그는 마침내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 때 동쪽에서는 강성한 동호(東胡)가 있었다(BC 209~BC174).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동호는 곧 사자를 보내 두만이 생전에 타던 천리마를 달라고 하였다. 묵특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하였다. 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여 있으면서 말 한 필을 아끼겠는가?” 동호에게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뒤에 동호는 묵특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알지(선우의 부인) 중 한 사람을 얻고자 한다는 말을 전했다. 신하들이 “동호가 무도하여 알지를 요구합니다. 청컨대 그를 공격하십시오” 하였다. 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한 사람의 여자를 아끼겠는가.” 드디어 사랑하는 알지를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의 왕은 더욱 교만해져서 동호와 흉노 사이에 천여 리에 걸쳐있는 버려진 땅을 요구하였다. 묵특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이것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으며 또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묵특은 매우 성내어 말하기를 “땅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 그것을 줄 수 있겠는가.”
그는 땅을 주자고 말한 신하들을 모두 참하였다. 드디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묵특을 경시하여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동호왕은 전사하고 흉노는 그 백성과 가축을 걷어드렸다.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달아나게 하고 남쪽으로 누번과 하남(河南)의 백양왕(白羊王)울 병합하였다. 북쪽으로 흔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치고 남쪽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되찾은 후 연나라와 대(代)나라로 쳐들어갔다.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이 쟁패 중이어서 흉노가 연,대를 침공한 것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비로소 중국을 통일하고 한왕(韓王) 한신을 대(代)에 옮겨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한신은 유방을 도운 대장군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니 한신이 항복하고, 흉노는 남쪽으로 태원(太原), 진양(晉陽)에 이르렀다. 한고조가 친히 출병하게 되었는데 때가 마침 겨울이라 몹시 추워 한나라 병사 중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진 자들이 많았다. 묵특이 약졸들만 내보내어 유인하니 한나라는 32만의 병력으로 흉노를 추격하였다. 한고조와 한나라 기병들이 먼저 평성(平城)에 도착했지만 대부분의 보병들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묵특은 40만의 기병으로 백등산(白登山)에 고립된 유방을 7일 동안 포위하였으니 한나라 군사들은 군량이 다하여 흉노의 대군을 상대할 상태가 못되었다. 한고조는 사자를 시켜서 몰래 후한 선물을 알지(閼氏: 왕후)에게 보내었다. 사자는 은밀하게 선우가 한나라를 쳐부수면 한나라에 있는 수 많은 미인들이 선우를 모시게 되니 그리 되면 알지의 처지가 딱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알지는 묵특에게 “두 나라의 임금은 서로 곤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곳은 선우가 끝내 살만 한 곳은 아닙니다. 또 한왕에게도 신(神)이 있는 것이니 선우는 살피십시오”라고 진언하자 묵특은 알지의 말을 쫓아 포위의 일각을 풀어주었다. 양쪽 군사들이 철수한 다음에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흉노에게 호된 곤욕을 치른 한고조는 흉노와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으니, 한고조를 이어 혜제, 소제, 문제, 경제는 유언을 충실하게 지켜 흉노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고,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바쳐 흉노와의 갈등을 피하곤 하였다. 당시 흉노와 한나라가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2) 한나라는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곡물을 바친다. 3) 한나라와 흉노가 형제 맹약을 맺는다. 4)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한다. 이 합의는 BC198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이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는 매번 늘어났는데 BC192년부터 BC135년까지 60여년 동안 9번에 걸쳐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가 증가했으니 실상 전한(前漢)은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 이 시기에 흉노는 동쪽으로 예맥, 북쪽으로 예니세이강 상류, 서쪽으로 알타이를 넘어서고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제 7대 한무제(BC141~BC87) 때에 이르러 흉노와 한나라의 역학 관계가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하여 김씨의 시조 김일제가 역사 기록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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