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정책과 조선총독의 고려대장경 간행 (6)
보스톤코리아  2014-11-04, 16:53:14 
2014-09-12


ㅡ 중일전쟁 ㅡ


 1936년 제11회 올림픽대회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독일의 히틀러 총통은 국위를 선양하는 의미에서 “민족의제건(民族의祭典) 이라고 했다.  게르만 민족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에서 인지 모른다 .  

 이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손 경주에 양정고보의 손기정선수가  일본을 대표하는 선수로 출전하여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 했다.   그런데  손기정은 한국선수가 아니고  일본선수로 출전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태국기가 아닌 일본의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선수가  태국기를  달지 못하고 일본의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했던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되어   일장기를 지우고 대신  태국기의 사진을 넣어 대한의 아들 손기정군이 베를린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일본정계는 손기정이 가슴에 달았던 일본의 일장기가 보이지 않고 한국의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뛰는 손기정의 사진을 보고 놀랐다. 대한의 독립을 절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사건이었다.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사장과 편집부의 기자를 검거 하여 투옥하고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시켰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제6대 조선총독 우기기가즈시게(宇垣一成)가 1986년 8월 경질되고 대신 관동군사령관을 지낸 미나미지로(南次郞) 육군대장이 제7대 총독으로 부임해왔다. 일본은 조선통치를 일층 강화하기 위하여 육군의 강경파인 미나미를 조선총독으로 보낸 것이다. 미나미는 일찍이 조선파견군 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을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만주와 조선의 사정을 잘 아는 자이다.  미나미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기간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전시 중 총독으로서 그가 조선에 어떤 정책을 펴왔는가를 확실히 밝히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중일관계는 1937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첨예하여졌다. 1937년 7월 7일이다. 중국의 북경 서남쪽에 흐르는  영하(永河 )의 노구교(盧溝橋 )  근처에서 일본의 북지 주돈군이 야간 연습을 한다면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그런데 그것은 실탄이 아니고  공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은  그것을 일본군이 도전해 온 것으로 알고 즉시 대항해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일본군 병사 하나가 용변을 보러갔는데 그것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생각이 없는 연대장은 중국군이 납치해간 것이라고 하면서 즉시 공격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昭和史, 우에무라시케기 저 참조) 이로 인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중일전쟁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많다. 만주사변과 같은 계획적인 침략전쟁이 아니라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서 취해진 불가피한 행동이 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전쟁은 만주사변에서부터  시작되어  중일전쟁(일본은 지나사변이라고 했음)과 태평양전쟁(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 했음)으로 이어진 15년의 전쟁이었음을 다 아는 사실인데 어찌하느냐 말이다. 노구교 부근의 전투로해서 중일 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고노에(近衛 )내각은 즉시 북중국에 가까운 관동군과 조선파견군을 북중국으로  보내 응원케 했다. 일본의 북지(북중국) 파견군은 7월 27일에 북경과 천진을 포위하고 중국의 제29군에게 투항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투항을 거부하고 오히려 완강히 대항하고 나오자 전투는 10여일이나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하여 29일에야 겨우 북경과 청진을  점령했다. 이때의 중일 간의 전쟁을  일본은 축소하여 “북지사변” 이라고 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은 북경과 천진의 점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37년 8월 9일에 상해의 노상에서 일본 해군의 오야마 이사오(大山勇夫)중위가 중국의 보안대원에게 살해되었다. 일본의 상해 육전대는 이를 구실로 하여 8월 13일 중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상해사변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오야마중위의 살해사건도 일본육군의 모략이 었는지 모른다. 제 2차 상해사변이 발단하면서 중일 간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의 고노에내각은 중국군에 대항 하기위해 8월 15일  5개 사단의 병력을 상해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쯔이 이시네(松井石根)대장을 파견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총공격에 나서게 한 것이다.

 국민정부의 장개석총통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면 전쟁을  다짐하면서 1937년 7월 8일 국민 총동원을 선언했다. 중국 공산당의 주은래 수상이 1937년 7월 11일 국민정부의 장개석총통에게 대일전에 공동 대처할것을 제의했다. 장개석과 주은래는 노산에서 회동하여 대일 통일 전선을 취할것에  합의했다. 

다음 호에 계속...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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