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의 세상 스케치 411 회
보스톤코리아  2013-08-26, 12:23:22 
어제는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보스톤 시내에서 딸아이와 큰 녀석이 함께 생활할 공간(아파트)에 필요한 가구가 도착한 날이다. 물론, 조립되지 않은 간편하고 저렴한 가격의 가구들을 사들인 까닭에 두 녀석이 끙끙거리며 애쓴 시간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깝게 지내는 아저씨와 조카 친구의 도움의 손길이 있어 한결 수월했다. 아직 아파트 내의 작은 공간은 정리되지 않았지만, 두 아이 방의 침대와 거실의 소파 그리고 부엌의 식탁이 정리되었으니 커다란 작업은 끝난 셈이다. 생활 공간에 필요한 자잘한 것들은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하면 될 것 같다. 

딸아이는 엊그제부터 초등학교에서 일을 시작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저것 공부할 것도 많거니와 준비물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그래도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엄마도 행복하다. 내년에는 대학원에 입학한다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하고 있다. 집에서 1년은 보스톤 시내에 기차를 타고 다니다가 얼마 전 다른 룸메이트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남동생이 보스톤 시내에서 대학원에 다니게 되어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딸아이는 어제부터 며칠 학교에서 리트릿(연수)을 떠나 정리는 모두가 우리 몫이 되었다.

아버지 쉰에 얻은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철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젊은 부모님을 둔 친구들의 교육 방식과 늙은 부모님을 둔 우리 집 부모님의 교육 방식은 확연히 달랐었다. 우선 '사랑의 방법'부터가 달랐다는 것을 세 아이를 키우며 더욱 깨닫게 되었다. 자식을 위한 사랑법은 가끔은 서운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은 무조건적 사랑이 강하셨던 까닭에 나 자신은 어른이 되어 혼자서 감당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세 아이를 키우며 다른 아이들보다 여느 부모들보다 조금은 엄격하고 강하게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 교육방법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세 아이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이 넉넉했던 이유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곁에 계시다는 것이 어려서 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그들에게 얼마나 큰 고마움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그 어떤 일이든 균형이 중요한 까닭이다. 그래야 더 멀리 더 높이 마음의 눈을 떠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어떤 일을 맞닥뜨렸을 때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객관적인 눈이 뜨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세 아이는 어려서 엄마의 쌀쌀함에 가끔 섭섭한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연년생으로 자라는 세 아이를 두고 그 어느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집안에서 놀거나 공부를 하더라도 간섭보다는 지켜보는 편이었다. 물론, 밖에서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며 동네에서 놀 때도 엄마의 눈으로 가끔 확인할 뿐이지, 다치지 않을 만큼에서는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일에 무심한 척 간섭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서로 형제간에 오가는 옥신각신도 하나의 '작은 사회'인 이유이다. 서로 그 일에 대한 해결 방법도 찾아내는 힘을 배우는 것이다.

어제는 아파트 공간에 놓아둘 물건들의 조립을 도와주시려고 가깝게 지내는 아저씨가 오셨는데 그분에게는 딸 하나가 있다. 지금은 결혼해 손녀딸도 두신 분이다. 우리 집 두 녀석이 서로 힘을 합해 일하는 것을 보시고 흐뭇한 표정으로 말씀을 해오신다.
"저 두 녀석을 보니 얼마나 든든하십니까?" 하고 말이다.
"뭘요, 자기네 일인 것을요." 하고 대답을 드렸다.
"이럴 때 아들 없는 사람은 아들이 있으면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하시면서 웃으신다.

우리 친정 집은 아들을 낳고도 키우지 못해 딸만 넷이 있어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무거운 물건을 둘이서 옮기며 두 녀석이 거실의 소파와 부엌의 식탁 그리고 방의 침대 세트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행복했다. 이제 다 컸구나! 싶은 마음에 잠시 지금은 아니 계신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들 셋을 낳고도 키우지 못하고 딸만 넷을 키우셨던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평생을 아들 자식에 대한 한(恨)을 담고 사셨던 어머니의 삶은 한 여자 개인의 한(恨)뿐만이 아닌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할머니 세대의 한서린 여인의 아픔이었고 역사였다. 문득, 두 녀석을 보며 '내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내 속에 아직도 남아 흐르는 '내 어머니의 한(恨)'인 게다.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작성자
신영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제 57회 홍하상의 일본상인 탐구 2013.08.26
15. 대대로 창작 젓가락을 만들어라 - 젓가락 260년 이치하라(市原)-1
헤드라인처럼 2013.08.26
디지털카메라의 이해와 활용 컬럼 171
신영의 세상 스케치 411 회 2013.08.26
두 녀석을 보며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내의 발톱 2013.08.26
한국에선, 삼류 월간지가 있었다. ‘아리랑’이니 ‘실화와 사건’ 이런류  잡지였다. 헌데, 이런 잡지들은 항상 한달 먼저 출판된다. 아직 오월인데, 칠월..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2 2013.08.26
원화(남모와 준정)진흥왕이 어린 나이(7세 – 삼국사기, 15세 – 삼국유사)에 즉위하여 모후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할 때 화랑의 전신인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