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8 |
보스톤코리아 2011-10-10, 13:56:16 |
중국의 저명한 학자 증기택(曾紀澤)은 당시 중국의 허약상을 변명하여 ‘잠이든 사자’에 비유했다. 그런데 일본의 사학자 우에무라 세이지 교수는 한술 더 떠 청나라를 병들어 누운 돼지에 비유했다. 그러나 지금의 중화민국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팬더곰과도 같아 그 경제 발전은 이제 일본을 능가하고, 국력은 강대 미국에 비견되고 있다. 어쨌든 당시의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볼 때 과거의 관계를 청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내정의 부패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아 그 허약상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은 그 세력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조선은 이 기회에 자주 독립을 실현하고 문명 개화하여 현대국가로 발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정개혁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첨예한 가운데 과연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 치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심각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모든 것을 시운에 맡기고 과감히 개혁작업에 나선 것이다. 국왕 전하께서는 고심 끝에 1894년 7월 27일 군국기무처를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국정개혁 사업을 이행케했다. 군국기무처의 총재에는 김홍집 총리가 임명되었고, 기무처의 의원으로는 김윤식, 박정양, 어윤준, 김가진, 이윤용, 김종환, 유길준 등 10명이 선입되었다. 군국 기무처는 내각과 입법부 그리고 왕명을 출납하는 추밀원의 기능을 겸한 국가 최고 기관이다. 그 직제는 다음과 같다. <군국 기무처 장정> 1. 군국기무처는 군국의 기무(機務) 일체를 회의하여 경장(庚張)하는 곳이다. 2. 군국의 기무는 본처가 의결한 후 그것을 품의하여 집행한다. 3. 총제 1인, 부총제 1인, 의원 10인 이상, 20인 이하, 서기관 2인내지 3인. 4. 의장은 서기관 1인을 선택하여 비서관으로 한다. 5. 군국 기무처의 사무분장은 다음과 같다. 6. 경외(京外) 제관부의 직제 7. 주현의 직제 8. 행정과 사법 일체의 규칙 9. 전부(田賦) 화폐 세제 및 행정 일반에 관한 규정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국기무처의 장점은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가 만든 정부 조직의 초안을 기초로 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장정 자체가 너무 허술하고 간략하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그 성과는 실로 대단하였다. 군국 기무처가 1894년 7월 27일에 창설되어 그 해 12월에 폐쇄되기까지 4개월 간에 처리한 개혁안은 무려 210건이나 되었다. 그것이 비록 일본 정부가 계획한 것이라고 하지만 단 시일 내에 그 많은 법안을 심의 처리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기무처 의원의 의지와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국기무처가 의결 집행한 안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조직의 개편과 지방행정 기관의 조례 그리고 국가 연호의 사용이었다. 정부는 종래의 의정부를 국내부와 내무부로 나누어 왕실과 행정을 분리 시킨 다음 종래의 이호례 병형공(吏芦禮 兵刑工)의 6부제도에 내무부와 외무부를 새로 설치하여 8아문(衙門)으로 분할하여 행정을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종래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던 것을 중단하고 독립 국가로서의 그 주권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연호를 개국 503년으로 정했다. 내각 제도에 따라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정부의 총리대신에는 김홍집이 임명되었다. 김홍집 내각의 각료는 다음과 같다. 총리대신 김홍집(1842~1895) 국내부대신 이재면(1845~1912) 외부대신 김윤식(1835~1922) 내무대신 민영달(1859~?) 탁지부대신 어윤중(1848~1896) 군부대신 이경원(?) 법무대신 윤용구(1853~1939) 학부대신 박정양(1841~1904) 농부대신 엄세영(1831~1899) 공무대신 서정수(1835~?) 경무사 안경수(? ~ 1900) 김홍집 내각의 각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엄세영 63세이고 가장 나이가 적은 이가 민영달 35세였다. 제 1차 김홍집 내각이 발족했다. 유신 일본 정부의 정체에 따라 입헌 군국주의 내각 책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이 치열한 와중에서 조선은 유신 혁명을 위한 서정 개혁을 이루어 갈 수 있는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청일전쟁을 기다려 보아야 알 일일 것이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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