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티비즘 |
보스톤코리아 2011-08-01, 14:05:28 |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극우에 반이슬람, 기독교 근본주의, 다문화주의 혐오로 똘똘 뭉친 한 명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저지른 폭탄 테러와 무차별 총격으로 76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사망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젊은 이들. 범인 브레이비크는 사이코패스였을까?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는 엄청난 파국을 가져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분명 엄청난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 행위의 본질을 정신과적 질환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슬림 이민자들로부터 유럽을 구하려”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너무나 태연히 밝히는 브레이비크의 말에, 일부긴 하지만 유럽 극우주의자들은 화답한다. “비단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서구 기독교 문화를 (이슬람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그의 대의에 공감한다”고.
유럽이 우향우하고 있을때 이미 감지되었을 흐름일지 모르겠으나, 토착민과 문화의 보호라는 명분하에 이민을 배척하는 정서를 네이티비즘(Nativism)이라고 한다. 미국 역사에서는 19세기 중반 “반이민”을 기치로 내세운 아메리칸 파티 (American Part) 혹은 Know-Nothing 당의 출현을 신호탄으로 잊을만하면 고개를 쳐드는 굵직굵직한 네이티비즘의 물결이 있다. 때로는 유럽 빈국으로부터의 이민물결에, 때로는 중국과 일본등 아시안 이민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에 대해 혹은 이슬람사회 전체에 대해. • 19세기 중반 아일랜드계 이민의 증가와 아메리칸 파티의 출현 19세기 중반 미국으로의 이민은 (영국계 이민을 제외하면) 독일과 아일랜드로부터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독일의 이민자 그룹이 주로 1848년 독일 혁명을 전후로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서 이주했다면,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했다. 특히 1845년에서 1850년 사이 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감자기근”을 피해 대규모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이들 두 그룹의 이주 이유가 전혀 달랐던 것처럼, 정착 스타일도, 또 미국 사회에서 받는 대접도 사뭇 달랐다. 독일계 이민자들은 가족단위로 이주해 와 대체로 중서부 농촌에 정착하였으며 농업 혹은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했다면,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대도시 빈민가에 정착, 비숙련, 일용직등에 종사했다. 또한 개신교도들이었던 독일계 이민자들과는 달리,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종교는 카톨릭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미 정착한 “미국태생 미국인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아이리쉬들은 미국사회의 천덕꾸러기였다. 그런데 1840년대의 경우, 전체 이민자들의 절반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증가하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에 대한 미국사회의 공공연한 반감은 1850년을 전후해 최고조에 이른다. “Help Wanted--No Irish Need to Apply” (직원구함, 아이리쉬 사양)이라는 유명한 문구가 일러주듯. 1840~50년대에는 반이민 정서가 정치적 운동으로 자리잡기도 했는데, “앵글로 색슨/개신교”의 가치 대신 “교황”을 따르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면 국가질서가 전복될 것이라는 식의 호들갑도 한몫했다. 반이민 운동은 한때나마 반이민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아메리칸 파티”라는 공식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 중국 이민을 금지한다, 1882년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 19세기 후반 반이민 정서의 주요 타겟은 중국인들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중국 이민자들에 나름 우호적인 시선을 가졌다. 특유의 근면함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부개척시절 대륙횡단 철도 건설의 산업역꾼이었던 중국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인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결국 1882년 미국은 약 10년간 중국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키는데, 이 법은 1892년 다시 10년이 연장되었고, 1902년에는 “영구히 중국 이민을 금지”하는 법안으로까지 변모하게된다. 이 법은 1943년 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이르러서야 철회된다. • 1924년 이민 제한법 (National Origins Act) 20세기 초반 반이민 정서의 타겟은 그리스, 러시아 등 남부, 동부 유럽 출신 이민자 그룹이었다. 1920년대, 국가가 주도하는 우생학 프로그램으로 강제 불임시술을 당했던 이들도 대부분 남/동부 유럽 출신 이민자들 (필자의 2010년 11월 15일자 보스톤코리아 칼럼 참조). 당시 원치않는 이민자들을 제한하게 위해서 마련된 법이, 잠정적으로 각국의 이민 쿼터를 출신 국가별로 기존 이민자의 3% (1910년 센서스를 기준)로 제한하는 1921년 긴급이민할당법 (Emergency Quota Act of 1921)이었다. 이 법은 1924년, 출신국가별 이민제한법으로 (National Origins Act of 1924) 개정되는데, 기준은 1890년 인구 센서스, 그리고 이민 제한 비율은 2%로 낮추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실제로 남부 및 북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이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후반이기 때문에 “미국이 원치 않는” 이민자 그룹을 차단하는데에 1921년의 법은 효과적이지 않았던 탓이다. 미국 역사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곤했던 네이티비즘인데, 역사는 참 얄궂다. 19세기 중반 천덕꾸러기였던 아이리쉬 이민자들의 자손들이 미국사회의 파워그룹이 되고, 숱한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영구히 이민금지라는 딱지를 붙였던 중국 이민자들은 2차대전시 “애국자”로 변모했었다. “이슬람으로부터 서구 기독교 문화를 지켜”내고 싶은 극우주의자들은 십자군 전쟁의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걸까. 미래의 역사에게 물어보시길.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소피아 [email protected] 이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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