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7. 히라가타의 백제사사적(百濟寺寺跡)과 백제왕 신사
보스톤코리아  2011-07-25, 14:10:07 
일본의 30대 비다쓰 천황은 신찬 성씨록에 백제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왕으로 즉위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고구려 평원왕이 국서를 보내 왔는데, 여러 사관을 불러모아 해독시켜 봤지만 3일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알아낼 수가 없었다.

백제사 유적지
백제사 유적지
 그래서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대신이 가와치의 가타노(지금의 히라가타 시)에 사는 백제 왕손 왕진이를 불러 들여 맡겼더니 금방 비문(秘文)을 풀어 버렸다고 한다. 조정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하는 가운데, 왕진이(王辰爾)는 조정 신하로 승진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쓰여있는 구절이다.

왕진이는 그 후에 지금의 히라가타에 사당을 세우고 그의 조상(백제왕)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왕진이의 후손 미마쓰 가문의 기록에 적혀 있는 이야기다.

후일에 백제가 망했을 때 의자왕의 아들 부여선광(善光)은 부여풍 왕자와 같이 왜국에 건너 갔다가 부여풍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 연합군과 싸우다 패전해서 고구려로 가버리고 자신은 왜국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왜국 정부는 선광을 중용하였고 백제 왕족으로 예우하여 주었다.

백제왕신사
백제왕신사
 선광의 자손들은 지금의 오오사카에서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사는 히라가타(당시의 가타노)로 터전을 옮겼다.
선광의 후손경복이 무쓰노 군의(지금의 도쿄)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는 쇼우무 천황의 치세였다.

그는 신라가 불국사라는 국사를 건립한 것처럼 나라 지방에 동대사라는 일본의 국사를 건축하고 있었다.
거대한 토목공사로 나라의 창고가 비어 있을 때 경복이 금광을 개발해 900냥이란 황금을 헌납하면서 쇼우무 천황으로부터 100년 동안 백제왕 씨의 번영을 약속 받았고 백제 왕족들을 백제왕이라는 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 후로 백제왕 경복은 쇼우무 천황의 신임을 얻게 되었는데 천황은 경복이 태수로 있는 가타노(히라가타)에 백제사를 건축하고 겸해서 경복의 선조인 선광-창성-낭우를 모시는 백제왕 신사를 건립하게 하였다.

특별사적 백제사적
특별사적 백제사적
 고문서 백제왕 영사모 유서에 의하면 “오진천황어대에 백제왕은 왕인을 파견시켜 논어와 천자문을 보냈고 스이코 천황 때는 백제의 아좌왕(阿佐王:아좌태자)이 경전 3600권을 전했다. 성덕태자는 그 공적을 기뻐하여 아좌왕에게 가타노에 토지와 저택을 베풀었다.”

그 후에 쇼우무 천황(724-749)은 왕인과 아좌왕이 유교와 불교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히라가타 나가노미야터전에 백제왕 사묘와 백제사를 건립하여 백제왕의 혼령을 모시게 했다고 한다.

백제사는 가마쿠라 시대(11-12세기)때 두번이나 불에 타서 지금은 터전만 남아 있어서 백제사 사적공원이라고 부른다.
비록 터전만 남아 있을망정 이곳은 딱 2개 뿐인 오오사카 특별 사적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다른 하나 특별 사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오사카 성이다.
백제왕 신사는 사적공원 안에 있는데 지금의 건물은 1827년 에도 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도리鳥居
도리鳥居
 당시 이 고장 태수였던 백제왕 경복은 후일에 간무 천황과 깊은 교우 관계를 가졌는데 나중에는 그의 딸이 간무천황의 황비가 되었다.

간무의 어머니는 무령왕의 후손 화신립(和新笠)이고 그의 황비는 경복의 딸로 모두 백제왕실의 후손들이다.
백제사 사적지를 가려면 히라가타 역에서 왕인 묘를 가는 것처럼 나가오(長尾)역으로 가는 1번 버스를 타고 2km정도 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철저하게 무너진 다음에 의자왕을 비롯한 1만 2천여명의 백제 사람들은 포로신세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 갔었다.

백제 왕족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백제 부흥운동까지 실패하였을 때 백제 땅에 남아 있던 유민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원수의 나라 신라를 피해서 살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이미 수많은 백제 사람들이 300년 동안 살아오고 있는 왜국으로 가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왜국에서 백제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다.
그들은 고국에서와 똑같이 백제왕자와 왕족들을 모시고 살았다. 또 왕족들은 그들의 백성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 왕족이 사망했을 때, 백제 사람들은 왕족을 제신으로 한 신사를 건축하여 제사하고 받들게 되었다. 백제 왕족을 제신으로 한 신사는 지금의 오오사카, 나라, 시가현 등에 많이 있는데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은 아마 히라가타에 있는 신사일 것이다. 백제왕들을 모신 신사를 소개하면

1) 귀실집사(鬼室集斯)를 모신 기시쓰신사. 귀실집사는 백제가 망한 후에 부흥운동을 벌인 복신(福信)의 아들이다. 의자왕의 종질로 백제가 망한 후에 700여 명의 유민들을 거느리고 망명했는데 일본에서는 백제 부흥을 위해 노력한 복신의 공을 인정 받아 5등관의 벼슬을 받았고 나중에는 학문을 관장하는 부서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의 묘가 교토 동북부에 있는 시가현(滋架縣)가모군에 있는 기시쓰 신사 경내에 있다.

2) 여자신(餘自信)을 모신 다카노 신사
백제에서 좌평(佐平)이라는 최고 관직을 지녔던 왕족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가서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라는 가문의 선조가 되어 오오사카 서쪽에 있는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 지역에 정착하였다.

3) 임성태자를 모신 기시즈(岸津)신사 임성태자는 백제무왕의 셋째 아들로 지금의 야마구찌현 호우시 다다라 해변에 도착했다고 전해온다,

그의 무덤은 대일고분이라고 부르는데 내부 구조는 역시 횡혈식 백제 무덤 양식인 석실분으로 되어 있다.
임성 태자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공을 인정 받아 쇼토쿠(聖德) 태자로부터 야마구치 지역을 하사 받고 오우치(大內)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토요다 자동차의 토요다(豊田) 가문은 오우치 가문에서 갈려나간 가문이다.
오우치 가문은 조선과의 교역이 많았고 특별히 조선에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정종실록 1년 7월 10일에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청원 하였었다

일본 사서에는 그가 백제를 597년에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2009년에 임성 태자의 45대 직계 후손인 오우치 기미오(大內公夫)씨 부부가 부여 능산리 2호분(성왕능으로 추정)에 무릎을 꿇고 “수많은 세월을 지나 대망의 조상의 땅에 지금 돌아 왔습니다.”라며 제문을 올리고는 익산시 석왕동 쌍릉(무왕릉으로 추정)도 참배하였다.

이것은 2003년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당숙 아사카노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천황의 허락을 받고 공주 무령왕릉을 참배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001년에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내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공언했지만 정작 그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한국인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누구에게 추천서를 받아야 할까요? 2011.07.25
스티븐 프라이드펠드 (Stephen Friedfeld)의 부모와 자녀가 함께 준비하는 탑스쿨 진학 프로젝트
텍사스 주립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2011.07.25
정준기 원장 교육 컬럼
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7. 히라가타의 백제사사적(百濟寺寺跡)과 백제왕 신사 2011.07.25
일본의 30대 비다쓰 천황은 신찬 성씨록에 백제 왕족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왕으로 즉위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고구려 평원왕이 국서를 보내 왔는데,..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 성공 2011.07.25
끝내 어린 소녀의 참았던 눈물을 몰래 흘려야 했던 순간이 우리들 눈에 들어왔다. 대통령과 기쁨을 나누던 피겨의 여왕 김연아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아무 준..
한미 FTA 모두가 참여를... 2011.07.25
“미국산 수입 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마시겠다”는 한 연예인의 어처구니 없는 시위의 소리를 듣기도 했던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