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6. 아스카 문화의 시조, 박사 왕인(王仁) |
보스톤코리아 2011-07-18, 14:43:21 |
일본 서기에 왕인(王仁) 박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오진왕 15년 백제왕이 아직기(阿直伎)를 통해 양마 (良馬)두 필을 보냈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의 스승으로 하였다.
오진 천황이 402년에 사망하자 태자인 제 5왕자 우지노 와키이라 쓰코 와 제 4왕자인 오오사자키 노미코토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자 제 2왕자 오오야마 모리노미코가 왕위를 노리고 제 5왕자를 살해 하려고 하였다.
이 시를 난파진가(難波津歌)라고 하는데 이것이 일본의 국시(國詩)와카(和歌)의 효시가 된다. 난파진가는 현재왕인 묘역에 전시되고 있다.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 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닌토쿠 천황은 백제신을 궁궐로 모셔오고 백제장군 목만치의 아들 (갈성습진언) 의 딸 반지원 명(磐之媛命)을 황후로 하였다. 닌토쿠 천황은 난파(難波 지금의 오오사카) 의 나니와궁(難波宮)으로 천도하고 그 지역을 백제군(百濟郡)으로 하였다. 그래서 여러가지 이유로 미즈노 유 교수는 오진, 닌토쿠 천황이 백제의 왕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에도시대 중기에 교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竝川誠所1688-1738)가 킨노혼 쵸우(禁野本町)에 있는 와타지 (和田寺)사찰의 기록에서 왕인 박사의 묘소가 후지사카의 오하카타니 (御墓谷)골짜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왕인 묘를 찾다가 현재의 자연 입석을 발견하고 왕인 묘표로 삼았다. 오오사카에서 왕인묘를 가려면 교우 바시 (京橋驛)에서 토우사이선(JR 東西線)을 타고 한시간쯤 가서 후지사카(䕨坡)역이나 그 다음 정거장인 나가오(長尾)역에서 내리면 taxi로 5분거리다 . 일본에서 기차 요금은 일반 급행이나 완행 요금이 값이 똑같다. 그러나 특급의 경우에는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버스에서 내려 왕인묘 까지는 2km정도 되는 언덕길인데 중간에 테니스코트 수영장이 있는 왕인 공원을 지나서 1000m거리에 박사 왕인지묘(博士王仁之墓)라고 쓴 돌비석을 만나면 그곳에서 왕인 묘역이 시작된다. 이 돌비석은 에도 막부 때인 1733년에 이 고장의 영주 쿠카이 마사토시가 세웠다고 한다. 왕인 묘역이 지금처럼 넓혀진 것은 1905년 명치유신 때 닌토쿠 천황의 나니와궁(難波宮) 천도 1500년 기념제를 거행하는 행사에 곁들여서 왕인 묘역을 확장하였다. 묘역 입구에 박사 왕인분(博士王仁墳)이라는 비석이 서있고 그 옆에는 동판에 논어의 첫번째 구절인 학이 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일절이 적혀있다. 이것은 고사기(古事記)에 적혀 있기를 4세기 말에 왕인이 논어 10권과 천자문 한권을 가지고 한반도의 백제국으로부터 도래 했는데 고대로부터 학문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아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하고 있다. 묘역은 무궁화와 전나무등 으로 잘 가꾸어져 있고 예전 김종필 총리의 식수가 잘 자라고 있다. 1938년에 대판부 (오오사카)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사적지정 50년을 기념하여 한일 문화 친선 협회가 묘전에 제단, 향로, 화병을 봉헌하였다. 협회는 2006년에 한국의 전통적 문화 건축 양식으로 백제문을 준공하였다. 백제문에 소요된 모든 자재와 목재 기와 돌등은 전라남도에서 운송 되었으며 기와에는 무궁화 꽃과 백제 왕인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문을 들어서면 1733년 이곳의 태수였던 쿠카이 미사토시가 세운 “박사 왕인지묘” 묘비가 옛날부터 있었던 자연 입석을 앞에 모신 채 우뚝 서있다. 묘지 왼쪽에는 한국식으로 지은 전각이 있는데 왕인의 한반도 연고지 영암에서 거행 되었던 왕인 축제를 찍은 사진들이 전시 되어있다. 2차대전 이후에는 이곳에서 매년 11월 3일에 왕인제를 열고 있으며 전라남도 영암군 과는 한일 친선 문화 협회가 있어 교류가 활발하게 벌어 지고 있다. 일본에는 왕인 박사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 고사기 속일본기 신찬성씨록 등에 많이 올라와 있지만 정작 그의 조국 한반도 사서(史書)에는 그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조선 시대에 일본을 다녀온 수신사 들이 일본 사서에 실린 왕인에 대한 기록을 거론 한 것을 계기로 왕인의 이름이 알려 지게 되었다. 1655년 일본에 갔던 남용익은 그의 저서 문견 별록 (聞見別錄)에서 오진왕 갑진년에 백제가 경전과 여러 박사 들을 보냈으며 을사년에 백제가 왕인을 보냈다고 기록 하고 있다. 1719년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이 문견 잡록 (聞見雜錄)에서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에서 건너간 문사 (文士)왕인, 아직기 등이 비로서 문자를 가르쳤다고 기록하였다. 왕인이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 났다고 쓴 기록은 “조선 환여 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충청남도 공주의 유학자 이병연이 100여명을 동원하여 12년동안 조선의 각지방을 답사, 조사한 다음에 1939넌에 간행한 조선 지리를 역는 책이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가 왕인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의 왕인 사당 앞에 보이는 산기슭에서 성인이 태어 났다고 해서 성기동(聖基洞)이라고 부른다. 산기슭에는 성천(聖泉)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삼원 삼짓날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면 성인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윌출산 뒷면에 왕인의 서고라는 책굴도 있다. 예전에는 유적지 앞에까지 물이 들어와서 상대포 라는 포구가 있어서 왕인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갔다고 한다. *지난 호 누락 부분: 긴메이(欽明) 천황의 세번째 비(妃)는 소가노 이나메의딸 견염원(堅鹽媛)이었는데, 7남 6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이 후에 요메이(用明) 천황이 되었고, 넷째 딸이 나중에 스이꼬(推古) 천황이 되는데, 그녀는 석희(石姬) 황후가 낳은 배다른 오라버니 비타쓰 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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