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3. 곤지(崑旨)의 아스까베왕국 |
보스톤코리아 2011-06-20, 15:10:47 |
일본 규슈 사가(佐賀)현의 가라츠(唐津) 항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가카라 시마 (加唐島)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다.
서기 461년에 이 작은 섬에서 한일 고대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백제 25대 무령왕이 이 섬의 바닷가에 있는 한 동굴에서 태어난 것이다. 왕자가 태어난 곳이 왜 이국 땅의 동굴인가? 이 의문은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알면 납득할 수 있다.
개로 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짝을 지어주며 “부인이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백제)로 돌려 보내도록 하여라”고 말하였다. 곤지를 왜국에 보낸 이유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왜국에 확실한 후방 기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왜국으로 오는 도중에 과연 개로왕의 말대로 규슈축자 각라도 (지금 사가현 가카라 시마섬)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산기가 돌아 사내 아이를 출산 하였다(461). 곤지는 그 아이를 섬에서 태어나서 “섬 임금”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상이 일본 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 신찬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있다. 백제 사람들은 가카라시마 섬을 나리무세마(王島)라고 불렀다. “나리무”는 고대한어로 나라의 주인 이라는 뜻이다. 곤지왕자는 사마왕자 모자를 본국으로 돌려 보낸 다음에 난바(지금의 오사까)에 상륙해서 가와찌(河內) 평야에 정착했다. 가와찌는 오오사까 동남쪽에 있는 지금의 후루이찌 (古市)주위의 평야 지대로 그곳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몰려 살던 곳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모여 사는 이곳을 편안하게 쉰다는 뜻으로 안숙(安宿)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 마을의 한가운데 에는 아스까베 왕국의 초대왕 곤지의 사당 아스까베 신사 (飛鳥戶神社)가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안숙골(安宿)은 한자로 安宿 ->飛鳥戶->明日香으로 바뀌어 갔으며 발음은 안숙골에서 아수구 – 아스까베 –아스카로 되었다. 얼마나 많은 백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 했을까? 학자들은 BC 3세기부터 AD7세기까지 천년 동안 왜국으로 간 한반도 도래인이 150 만명이라고 한다. 백제, 가야 사람들이 다수였지만 고구려 신라인들도 많았다. BC3세기 이후 천년 동안 전 세계 인구 증가율이 년 0.1%였는데 일본만은 년 0.4%였다고 한다. 그 이유야 물론 매년 한반도 도래인 숫자가 자연 증가율의 3배에 달했다는 얘기다. 인류학자 고야마 수조(小山修三) 교수는 죠몬시대 일본인구는 겨우 7만 6천 이었는데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 도래인이 급증해서 60만 명이 되었고 아스까 나라시대(719-784)에는 무려 540만 명으로 증가 하였다. 급증한 이유는 역시 한반도 도래인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도쿄 대학의 하니와라 가즈오 (直原和郞) 교수는 두개골 형태 변화 실험을 통해 기원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일본 열도 서부지역의 원주민: 도래인 비율은 1:8에서 1:9로 도래인이 전체 인구의 8-9할이 되었다고 한다.
가와찌 왕조를 연구한 사학자 가도와끼 데이지 (門脇 禎二) 교수는 곤지왕의 아스까베 왕국에 대해서 말하기를 5세기 말에 시나가다니 (이시까와 골짜기)의 가와찌(河內) 지역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곤지왕이라는 백제 왕족이 이 골짜기에 그 가족과 일가종속을 거느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는 후일에 아스까베 신사의 제신이 되는 사람이다. 다섯 아들과 가속, 종속 등 큰 집단을 이끌고 왔는데 그들이 가와찌 역사의 근원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곤지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학자들은 항상 극우 단체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감안 하여야 한다. 당시 일본 열도는 수많은 부족 국가들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 왜인전에 적힌 기록으로는 규슈에만 해도 28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규슈에 있는 백제의 후국(后國) 고마 (固麻)국이었다. 혼슈(本州)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시마네 현에 신라계 이즈모 왕국, 오까야마 현에 기비 3왕국 오오사까 지역에 또다른 백제 부족국가 남섭진국 등 수십 개의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가와찌의 아스까베 왕국도 그중의 한나라였지만 일본 사학계는 아스까베 왕국에 대해서는 감추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가와찌에 생긴 이 왕조가 오진 닌토쿠 천황에 의해 건설되고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믿기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연대가 맞질 않는다. 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도록 이들 천황의 나이나 재위 기간을 고무줄 늘리듯 잡아 당겨 놓고 있다. 오진 천황은 41년을 왕위에 있었고 110세에 사망했다고 일본 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사기(古事記)에는 130세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 다음인 닌토쿠(仁德) 천황인데 무려 87년 동안 재위에 있었는데 수명은 재위 햇수에도 못미치는 83세로 되어 있다. 또 닌토쿠 천황 재위 마지막 20년 (67-87)동안은 태평 세월이 계속 되었다고 아무것도 기록 되어 있지 않고 있는데 만약 닌토쿠 천황의 재위 연대가 맞다면 일본 서기 기록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20년 동안에 한일 역사에 중대한 사건이 여러 해에 걸쳐 발생하였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왜국의 침범이 있었다는 시기가 이때였다. 왜국은 위급한 백제를 구하려고 고구려 광개토왕 원년(391, 닌토쿠 재위 79년)에 한반도에 출병하였다. 광개토왕 10년은 왜군이 고구려군 에게 패하여 본국으로 달아난 때였다. 왜국의 국가 존망이 백척간두에 달렸는데 일본서기에는 태평성 대로 기록되어있다. 누군가 일본을 통치했던 사람의 업적을 지울 속셈으로 오래 전에 왜국의 왕이었던 오진과 닌토쿠 왕의 재위 기간을 뻥튀기한 것이다. 곤지 왕자가 세운 아스까베 왕국은 서기 461년 후에 세워진 나라였고, 오진, 닌토쿠의 재위연도는 서기 270~397년이었다. 일본서기의 후속 문서로 “신찬 성씨록”이라는 사서 (史書)가 있다. 왜국에서 활약하던 주요인사들의 출신과 근거지를 제시하는 족보와 같은 역사서다. 여기에 기록된 많은 한반도 도래인의 본관이 지금의 오오사까 (가와찌) 부로 되어있고 그 수장은 곤지왕으로 되어있다. 신찬 성씨록에는 곤지왕을 미야즈꼬(造) 즉 그 지방의 수장 정도로 축소 기록하고 있다. 아스까베 왕국의 존재를 나타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본 서기에서 곤지왕을 코니키시로 호칭하고 있다. 백제에서는 왕의 호칭이 어라하(於羅瑕) 또는 길지(吉支)였다. 일본에서는 백제의 언어를 도입해서 왕을 코니키시 또는 코키시로 불렀는데 어원은 건길지(建吉支)에서 나온 말이다. 건의 ㄴ 받침을 발음할 수 없으니까 거니김지-코니키시가 된 것이다. 이곳 가와찌 송악산에 있는 국분신사(國分神社) 마당에 세운 석등에는 가와찌 안숙군국(河州安宿郡國)이라는 이름이 새겨 있는 헌등이 세워져 있다. 우리말로 가와찌 안숙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었다. 아스까베는 나라의 이름이었고 아스까베의 수장 곤지는 아스까베의 왕이었다. 사학자 들은 가와찌 아스까를 “ 가까운 아스까”로 부르고 나라에 있는 아스까를 “먼 아스까” 또는 “야마도아스까”라고 부른다. 당시에 나라분지 미와산(三輪山)일원에 천황족이 세운 미와왕국(三輪王國)이 있었다. 후일에 가와찌 아스까베 왕국이 미와 왕국과 합병해서 세운 나라가 야마도 왕국, 즉 야마도 아스까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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