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갑오경장> (3)
보스톤코리아  2011-06-20, 14:58:31 
▶▶지난 21호에 이어서

청일의 대립
중국의 엽지초 제독은 3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2월 상순에 충청도의 아산만으로 들어와 상륙했다. 일본군이 먼저 인천에 상륙하여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인천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충청도의 아산만으로 왔다고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충청도의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아산만으로 들어와 상륙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청, 일 두 나라의 군대가 밀려 닥치자 동학군은 나라의 장래가 크게 염려되었던지 관군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7월 초순 전주에서 회의를 개최. 정부에 제의하기를 서정의 쇄신, 탐관오리의 숙청, 노비문서의 소각, 일본과 내통하는 자의 처벌 등 12개 항복의 요구조선을 제출하면서 화의를 청했다. 정부가 그들의 요구조선을 다 받아 들이기로 하자 농민군들은 더 이상의 투쟁을 멈추고 스스로 해산했다. 이리하여 동학 난은 청, 일 어느 나라의 군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진압된 것이다.

이제 조선에서 내란이 진정되었으니 동학 난을 진압하기 위한 원군으로 파견된 청나라의 군대와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출동하였던 일본군은 천진조약에 따라서 모두 조선에서 철퇴해야 한다.
천진조약 제 3항에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퇴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청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천진조약의 약정을 무시하고 각각 이유를 들어 조선에서의 철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일본은 주장하기를 자기나라의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 시켜야 한다고 했고, 중국은 조선이 자기나라의 속국이기 때문에 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당분간은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병력을 더 증강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오도리 일본공사는 청나라의 원세개에게 청하기를 조선정부에 권하여 적극적으로 정치를 개혁하고 이후는 난민이 봉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청일 양국이 개혁에 필요한 의원을 파견, 조선이 내정을 개혁하는데 같이 협력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원세개 판리공사는 오도리 공사의 제의에 반대하며 말하기를 조선은 자기자신의 능력으로 정치를 개혁해 나갈 것이니 일본의 여하한 권고나 협조가 필요치 않다. 일본은 속히 조선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원세개 판리공사는 조선의 국왕에게 일본군의 철퇴를 명령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일본공사 오도리 게이스게는 원세개 판리공사에게 항의하기를 청나라가 더 이상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것은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크게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서는 조선정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3개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출하며 압박을 가해왔다.
1. 명치 18년(1884년)의 조약에 따라 우리(일본)군대를 위하여 병명을 건축할 것.
2. 속국보호의 명목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에 관한 문제이므로 청나라의 군대를 철퇴 시킬 것
3. 만일 3일 이내에 이에 대한 해답이 없을 때는 우리(일본)는 조선정부의 개혁을 강행할 것임.
위의 요구사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청, 일의 대립상황은 심각하여 양국의 세력다툼에 조선정부는 그 방향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원세개 판리공사는 오도리 일본공사에게 질문하기를 일본이 그 같은 행동을 하는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것이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원세개 판리공사는 일본공사에게 보내는 외교통첩에서 두 번이나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했다. 그에 대하여 일본의 오도리 공사는 답변하기를 일본제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Korea and neighbors, 1905. 참조)

조선은 1882년에 미합중국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로 영, 독, 불, 노, 등 선진열강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 서양각국공사들이 서울에 와 주재하면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극동 아시아의 중심지역으로 엄연한 독립국가 이었다. 그럼에도 청나라는 종래의 변방국사에 대한 속국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조선을 자기나라의 영역에 속하는 속국이라고 하면서 그 독립과 서양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 하는 것을 방해해왔다.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일본공사 오도리게이스게는 공격의 화살을 조선정부로 돌려 6월 28일 조선정부에 대하여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인지 아니면 자주 독립국가”인지를 24시간 내에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해왔다.
“조선은 자주 독립국가이다”라는 그 한마디 말은 당연하고도 간단한 말 같지만 그 대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한마디의 대답으로 조선은 역사이래 중국과의 관계를 청산해야 하고, 정치제도를 바꾸어야 하며, 따라서 역사의 진로가 바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극동 아시아의 안보체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전후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 일본공사 오도리에게 “조선은 독립국가이며 일본과 같이 최고권력을 가지는 나라이다”라고 대담한 답변을 일본공사 오도리 게이스게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양국의 대립현상은 이제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그 해결책이 실로 낙망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남북대립현상이나 북 핵문제를 가지고 벌이는 6자 회담과 같은 인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청일양국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그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를 바 없었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3. 곤지(崑旨)의 아스까베왕국 2011.06.20
일본 규슈 사가(佐賀)현의 가라츠(唐津) 항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가카라 시마 (加唐島)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다. 서기 461년에 이 작은 섬에서 한일..
정기검진 2011.06.20
주치의 보러 가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는 것 같다. 건강 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으면 가지 않는 경향이 있고, 있는 사람들도 일 때문에..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3) 2011.06.20
▶▶지난 21호에 이어서 청일의 대립 중국의 엽지초 제독은 3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2월 상순에 충청도의 아산만으로 들어와 상륙했다. 일본군이 먼저 인천에 상륙하여..
순국열사 안중근과 어머니의 교훈 2011.06.20
이 시간에는 한국이 낳은 사자의 가슴을 소유한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안중근 의사입니다. 삼 세대 믿음의 가정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중근 의사는 훌륭..
신영의 세상 스케치 - 303회 2011.06.20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