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9
보스톤코리아  2009-11-02, 15:04:50 
발해의 제2대 무왕이 서기 738년에 서거했다. 장남인 흠무(欽茂) 가 왕위를 계승하니 제 3대 문왕이다. 문왕은 즉위하자 그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바꾸고 전국에 대사령을 내려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앞서 무왕의 동생인 문예가 당나라로 도망하여 귀순한 관계로 당나라와의 사이에 한동안 험악한 관계에 있었는데 문왕이 즉위한 후로 문제 삼지 않아 없었던 일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0여 년에 걸친 당나라와의 불화는 해소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당나라 현종은 서기 739년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발해에 보내 발해의 문왕을 좌요위 대장군으로 그 직위를 높이고 발해국 왕에 책봉했다. 이후로 당나라와의 관계가 평온하여 사신의 왕래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발해의 문왕은 대흥 20년 (756)에 수도를 현덕부에서 멀리 북쪽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와 기타 여러 문헌에서 상경용천부라고 기술한 데 반하여 신당서는 상경 용정부(龍井府)라 기록하고 있다. 그 지명으로 볼 때, 용정부가 옳은 것 같다.

그러면 문왕이 그 수도를 현덕부(顯德府)로부터 300여리나 떨어진 목단강 동편의 영안 (寧安) 지방으로 멀리 옮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얼핏 생각되는 것이 그 전해인 서기 755년에 당나라에서 절도사 안록산(安錄山)이 난을 일으킨 사실이다.

한 개인이 집을 이사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인데 하물며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성을 옮기지 아니하면 아니 될 무슨 곡절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혹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그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미리 도성을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 하게 된다.

상경 용천부 천도에 대하여는 뒤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옛말에 천하의 치란 과 국가 흥망에 안중위생(安中危生) 하고 위중안생(危中安生)하니 상불망기위(常 不其그危)이라고 하였다. 당 현종은 60여세의 노인으로 26세의 딸 같은 양옥환 (양귀비의 본명임)을 데려다가 황후에 다음가는 귀비(貴妃)에 올려놓고 노년의 고적함을 달래보려고 하다가 그만 그녀의 요사한 애정에 말려들어 국사는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다가 안록산의 난을 당하여 촉당으로 피난하였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이라 했다. 그녀는 사천성의 말단 관리의 딸로 그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16 세 때(서기735)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 왕자의 눈에 들어 왕자비로 간택되어 황실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건달인 친정오빠 양국충을 데려다가 우상(右相) 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혀놓고 국사를 마음대로 했다. 애굽의 크레오파트라는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사랑을 나누다가 나라를 잃었고, 당나라의 양귀비는 현종과 사랑을 탐욕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국색(國色)으로 그 이름이 역사에 높다.

동양사는 은나라 주왕의 애첩 달기와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의 고사(故事)를 격언으로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빈계사신은 유가지색(牝鷄司晨惟家之索)이라고 하여 여성의 권세를 경계하는 말로 사용되어왔다.

일찍이 고종황제께서 황후 민비를 일본인 손에 잃고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였을 때 엄상궁을 맞아 들여 그 존호를 엄귀비로 모시자고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양귀비의 가증스러운 선례가 좋지 않아 엄비로 모시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양귀비의 득세로 당황실의 내부의 문란과 정치의 부재는 결국 서기 755년 12월에 절도사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게 된다. 안록산(704 - 756)이 당나라를 정복하려고 난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양귀비(719 - 757)와의 사랑 때문이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는 웃기는 소문이 많이 돌았다.

14세나 연상인 안록산을 양귀비가 양자로 삼았다고 하니 (신 중국사, 존 k 훼어벵크 저 참조)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하기야 당 현종이 양귀비의 간청에 못 이겨 안록산을 양자로 들였다면 혹 얘기는 될지 모르나 어쨌든 중국의 역사에는 도독의 문란으로 웃지 못할 장면이 많다.

당 현종은 서기 755년 절도사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서역 정벌로 그 무술이 뛰어난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안록산 반란의 진압을 위한 정토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여 출정케 했다. 고선지 장군의 관군은 선발대로 나갔던 관군이 반란군에 의하여 패배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선지 장군은 지정한 방어지 협주(狹州)로 가지 않고 도로혀 동관(東關) 쪽으로 무단 이용하였다가 부관 변영성의 밀고로 체포되어 진중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한다(한국 인명대사전 참조). 이미 패전한 군대를 뒤 쫓아가서 구원한다는 것은 일종의 고식지계(姑息之計)이지 무슨 성과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한 장수가 적과 싸우려고 나아갔다가 전략상 불리하여 딴 길로 진로를 바꿀 수도 있는 일인데 그로 인하여 패전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처형할 것까지는 못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도 고선지 장군에게는 처형을 받을만한 다른 약점이 있었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죄명은 반란군의 두목 안록산과 내통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질투와 시기가 심한 한족부관 변영성의 중상모략인지 그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고선지 장군은 반란군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의 유민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구려가 나당군에게 의하여 패망한 무렵 포로가 되어 당나라에 끌려갔던 고구려의 한 장군의 아들이었다. 고선지 장군의 옛 고향은 지금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상수지방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친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고구려 왕족의 성씨인 고씨인 것으로 보아 왕족이 아니면 왕족이거나 장군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포로의 자식이라 한족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면키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무술을 연마하여 당나라의 군인이 되어 힘을 키웠다. 힘이 없으면 나라의 독립도 개인의 자유도 평화도 번영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일제때의 한국사람이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일본군의 장교가 되려고 노력한 것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으로부터 멸시를 당하지 않고 미구에 있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할 것이다.

고선지 장군은 포로의 자식이었지만 그의 높은 무술과 탁월한 전술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서기 748년 당나라의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1만 5천 피트의 험준한 파미르 공원을 넘어 서역의 72개국을 정복한 세계적인 전략가였다.

서기 751년 제 3차 원정에서 아랍의 연합군에 의하여 패배를 당하였지만 당 현종은 그의 전략과 용맹을 높게 평가하여 왕족에 버금가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이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했을 정도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왔지만 절도사 안록산은 돌궐인이었다.

돌궐은 발해 태조 대조영 때 우호 관계를 가졌던 사이였다. 무엇보다도 안록산은 고선지 장군의 출생신분과 그가 놀라운 전략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선지 장군의 출정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고선지 장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전세를 유리하게 하지 않으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록산은 고선지 장군에게 상당한 조건을 제시 하면서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는 지도 모를 일 이라는 것이다.

백린(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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