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하나인가?
보스톤코리아  2009-06-22, 15:02:22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주어진 자유 시간이며 자살이란 사랑하는 법을 포기하고 마감하는 어리석은 자의 항변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은 아름다운 평화의 축제가 됩니다. 저희들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 있는 화평의 축제가 되기를 저희들 각자는 모든 이웃을 항상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이미 천국을 향해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상이 고통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는 실제로도 세상은 고통뿐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창조주는 거역하고 우주의 자유 속으로 가뿐히 몸을 던지는(아, 노무현) 상처뿐인 육신으로 하나님이 부모님 통해 허락하신 생명을 투신자살로 벗어버리는 어리석은 자의 마감이 자연인으로서 가슴 에이고 안타깝지만 공인으로서 그의 행위는 적절치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최대의 자살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으며 교통사고로 죽는 자보다 자살자가 더 많은 한국에 공인으로서 자살자의 수를 더하는 이런 식으로 생을 지워 버리면 그 영향은 어떠할까?

어린 소녀 소년이 집단자살 그룹까지 만들며 동반 자살이 유행처럼 되어 있는 조국에 삶을 업신여기는 모범이 되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전직대통령이 자살(타살)하는데 나 같은 인간은 못할 것 없지 하는 풍조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서민 같은 전직 대통령이 땅에 떨어져 죽었으니 돈, 명예, 권력 없는 서민은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사회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가정에 표본이 되어야 할 공인의 석연찮은 부부에 돈문제, 상상 못할 고가의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고백 거짓이 실언을 낳고 결국은 투신이라는 언어로 귀결하는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다.

광주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도 아직은 시퍼렇게 살아 뻔뻔스럽게 골프 치고 돌아다니는데 그를 질타했던 그를 이렇게 먼저 떠나 보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아, 노무현).

공권력에 의한 뇌물죄는 1억을 받든 1,000억을 먹든 성립되는 것이고 죄를 타인과 비교하면 위로는 될지언정 죄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고달파 지하철에 뛰어든 하찮은 죽음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아, 노무현)
실례지만 자살에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지하철에 뛰어든 자살은 하찮은 죽음이고 부엉이바위에서 우주의 자유 속으로 가뿐히 몸을 던지는 것은 장려 되어야 하는 자살인지를?

예일, 노틀담,하바드에서 가르쳤으며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토론토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장애자를 섬겼으며 천주교 신부이며 영성작가인 헨리나우엔 저서 사랑의 내적 목소리(inner voice of Love)에서 그는 내 인생에 어려운 시기, 고통스런 시기가 닥쳤을 때 진실로 계속 내가 살아야 하는지 즉,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꼈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는 인간이면 한번쯤 느끼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

그토록 건강한 영성을 지닌 신부님도 자살까지 생각했다니 이해할 수 있습니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법으로 장례식을 금지했고 시신을 비석 없이 길가에 매장토록 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1670년에 미리 엄하게 다스리는 의도에서 자살자의 재산을 국가에서 몰수토록 했다. 지금도 자살은 생명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19세 초엽까지 영국에서는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이 자살했을 때 범죄자로 취급했다.1825년까지 그리스의 전통에 따라 길가에 매장시켰고 요 얼마전 1961년까지 프랑스의 범례를 쫓아 자살한 사람의 재산을 몰수했다(중앙일보).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 7지옥에는 첫번째 하나님에 대하여 폭력을 행한 경우이고 두번째 자기자신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한 것. 자기자신에 대한 폭력이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폭력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로우심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프레드리 2세 왕의 신복 피에르텔라비냐는 나는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쇠꼬챙이로 두 눈을 파내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육체적 고통쯤은 견딜 수 있지만 반역자로서 굴욕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죠.

그래서 나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최후의 방법으로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이 오면 죽은 자 모두가 자신의 육체를 되찾고 고통도 덜게 되지만 자살한 자는 그렇지 못하다. 스스로 버린 육체를 다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도 시체를 끌고 이 지옥 숲으로 다시 돌아와 육체를 자기 영혼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단테 신곡).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세속적인 번영을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은 저주 받은 번영이다. 경건하게 살면서 가난한 것이 무한히 더 행복한 것이다.(칼번)

김영경(보스톤 한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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