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컴퓨터를 도입했던 하버드대 교목 강래문 목사 |
보스톤코리아 2007-08-26, 20:44:33 |
보스톤 코리아 초대석 : 50년 전 초기 유학생에게 듣는다
정일권씨와의 인연으로 박대통령에게 컴퓨터 소개 1970년 초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정일권 국무총리 등이 참가한 국무회의 석상에서는 색다른 주제가 논의됐다. 반정부 운동도 유신도 아니었다. 당시 정부인사들은 전혀 모르고 있던 컴퓨터가 그 주제. 당시 강사는 한국인 최초로 IBM에서 근무했던 강래문 씨. 이후 중학교 입시가 컴퓨터화 됐다. 2007년 하버드 법대 건물 바로 옆 하버드 한인선교회 지하 사무실에서는 하버드대 교목으로 근무중인 강래문 목사가 설교 및 각종 교회 활동 준비에 여념이 없다. 40여년 간격이었지만 국무회의장과 하버드 한인선교회를 오간 강래문 목사(72)는 53년도 미국에 유학 온 유학생. 한국 전쟁 중에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가졌던 커다란 꿈은 결혼하고 애를 가지면서 작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많의 희석됐다. “한국으로 돌아가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고. 청년 강래문이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은 인연의 끈에 의해서다. 강래문 목사는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갔던 강래문 목사는 군에 입대해 일선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병원에서 미국 군목을 만났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강래문 목사는 금방 군목의 눈에 띄게 됐다. 군목이 미국에 돌아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알려 청년 강래문을 초청해 헨드릭스 칼리지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대망의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4년간 헨드릭스 칼리지에 다닐 때는 한국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57년 보스톤의 보스톤 대학(Boston University)에 입학하면서 한국 유학생들과 조우하게 된다. 당시에 하버드에 다니던 한국 학생은 총 7명이었다. 현재 하버드 보건대학장으로 있는 고경주의 아버지인 고광림씨가 당시 하버드 법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정재식 박사, 조진양 박사도 보스톤에서 학업중이었다. 조진양 박사는 대원군에 대한 논문을 썼지만 너무 고생이 심해서인지 박사학위를 받고 1년 후에 세상을 떴다. 강래문 목사는 “(건강하지 못하면) 고생해서 공부해도 효과없이 사라지게 된다”고 회상했다. 당시, 동양 사람을 보면 누구에게나 한국사람이냐고 물었고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수는 매우 적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이면 결혼한 가정들이 학생들을 초청하거나 교회에 모여서 음식을 같이 나눠먹었다. 당시에 한인 학생회가 있었는데 약 180여명 됐으며 현지에 정착한 가정을 중심으로 한 한인회도 12가정 됐다. 모임의 목적은 친목이었다. “보스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 예일이 있는 커네티컷(Conneticut) 주의 뉴헤이븐(New Heaven)에서도 다트머쓰 칼리지가 있는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다트머쓰(Dartmouth)에서도 왔다”고 강래문 목사는 말했다. 하지만 이 적은 수의 한인 학생들도 불화를 겪었다. 강목사는 자세히 말하는 것을 몇번이나 회피했다. 불화의 이유에 대해서 묻자 정치적인 이해가 달라서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기고 출신의 학생들과 비 경기고 출신의 유학생들간의 갈등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보스톤 한인학생회장이었던 강래문 목사는 “그때는 우리나라가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불화를 겪었지만 이제 한국도 선진국이니 이같은 불화는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유학생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밤에 접시 닦이, 청소, 유리창 청소, 페인트칠 등을 했어야 했다고. 장학금을 받아도 대부분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강래문 목사도 컴퓨터 공장에서 청소를 했었다. 여기서 사람들을 채용했는데 시험을 치라 해서 시험을 보게 됐고 트레이니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 회사가 바로 IBM이었다. 근무부서는 내셔널 캐쉬 레지스터 리서치 디파트 먼트. 이게 직장이 되었다. 이 무렵 정일권씨가 보스톤으로 유학을 왔다. 또한 상당수의 유명인사들도 하버드의 펠로우로 왔다. 정일권씨와 친분을 나누게 됐고 한국으로 간 정일권씨는 중학교 시험과정을 전산화하기 위해 강래문 목사를 초청했다. 처음 32명을 데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전산원이 커져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우리나라에서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다음 세대에나 만들자’며 돈을 주지 않았다”고.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중학교 배정을 전산화 하면서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전산화를 통해 학교를 배정받게 됐다. 정치권에서 박지만을 좋은 학교에 들어가도록 해달라고 강래문 목사에게 부탁해왔다. 프로그램이 무작위로 돌아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결국 별로 좋지 않은 학교에 배정받게 됐다. 이후 박지만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 바로 바뀌었으며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렸다.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정권이 바뀌며 강래문 목사는 다시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산화를 지도했다. 미국에서 결혼해 3자녀를 모두 키웠다. 당시에는 남학생대 여학생 비율이 9:1이었다고. 자녀들은 장성해 사업가, 교수, 의사 등이 되었고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결국 사업가로 30여년을 보낸 후 1993년 58세의 만학도로 하버드 신학대에 입학했다. 1996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97년부터 하버드 교목으로 임명됐다. 50여년 전의 유학생활과 지금과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강래문 목사는 “옛날에는 한국사람끼리 모인다면 멀리서 불러도 가서 2-3일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별로 없어졌다.”고 말한다. “경쟁이 심해진 까닭”이라고 지적한 그는 “각자 전문화된 분야를 개발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장명술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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