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은 누구인가?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1-12-20, 11:17:35 
원성왕릉 쾌릉의 무인석,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원성왕릉 쾌릉의 무인석,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숙종 3년 758년 중국 남쪽 해안도시 광저우(지금의 홍콩, 선천) 지역에는 페르시아, 아랍 상인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살고 있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당나라 관헌과 페르시아, 아랍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다. 소요사태가 확대되어 아랍인들이 광저우시를 약탈하고 인근의 해남도로 도망하여 해적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숙종이 크게 분노했지만 안록산의 난이 바로 끝났을 때라 머나먼 광저우까지 힘이 미치지 못했다.

당나라 숙종을 대신해서 아랍, 페르시아인들에게 복수를 한 사람은 전신공(田神功)이라는 양주, 서주지역의 군벌이었다. 그는 양자강 어귀의 무역도시 양주로 쳐들어가 이곳의 아랍, 페르시아인 수천명을 학살하였다. 광저우에서 학살이 발생한지 2년 후에 이번에는 양주에서 학살이 발생한 것이다. 당나라 때는 광저우, 천주, 양주를 비롯한 여러 항구도시에는 여러나라 선박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중에 무슬림, 특히 페르시아의 배들이 많았다. 

특히 광저우같은 남쪽지방에서는 특별하게 페르시아인들을 가리켜 박주(선박주인)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외국 선박 가운데 페르시아인 소유가 가장 많았고 중국 선박들도 페르시아 사람을 선장으로 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박에 관한 용어도 거의가 모두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것이 많았고 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항만을 관리하는 관리들에게 불만을 품은 나머지 관아를 기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에 대한 당나라 사람들의 복수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당나라 산동성에 황소라는 소금 밀매업자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소금을 정부가 전매했기 때문에 값이 비싸고 세금이 과도하여 소비자인 백성들의 비난이 과도하였다.

이에 소금을 밀무역하던 황소 일당은 소비자들에게 반값으로 판매하였다. 그러자 당희종은 황소같은 밀매업자들을 색출하게 되고, 견디기가 힘들어진 이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이를 황소의 난(875~884)이라 하여 10년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황소의 반란군들은 878년에 당나라 남부 무역도시 광저우를 기습 공격하여 아랍, 페르시아인들은 물론이고 유태인, 기도교도, 조로아스터교 교인들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아부자이드의 기록에 의하면 황소군에게 살상당한 외국 상인들은 12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인구가 50만명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사람들이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황소군은 뽕나무 밭도 헤쳐 버렸는데 이는 아랍 사람들이 누에를 다시 치지 못하게 하려고 그리한 것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날 당시에 항주, 천주에서도 무슬림들이 핍박을 피해 도망쳤는데 중국의 소수민족인 회족(回族)들이 학살을 피해 도망쳤던 무슬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헌강왕 879년, 학살 후 바로 그 다음해에 처용이 등장하게 된다. 그림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매부리코에, 눈이 깊고, 붉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중동사람의 얼굴이었다.

페르시아 역사를 전공한 이희수 한양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는 "처용이 아랍 상인임을 특정하는 기록은 없지만 처용 등장 당시에 황소의 난으로 인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들 상인들이 신라를 일상적으로 드나들었던 점을 고려하면 처용은 무슬림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당나라 동남부 해안에는 당고종 때인 7세기경부터 아랍 페르시아인 공동체인 변방이 양주를 경계로 형성되어 있었고 북쪽에는 장보고를 주축으로한 신라, 일본, 중국 동북부 해상 교역권이 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가 피살되면서 청해진이 격파되면서 동북아 해상권이 무주공산이 되어 아랍 상인들이 직접 진출하고 처용일행이 신라에 피난처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이슬람인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해안 도시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중국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중국 성과 이름을 새로 만들고 의상과 관습을 중국식으로 바꿨다. 

오늘날 회족으로 불리는 무슬림의 선조가 된 셈이다. 중국화된 무슬림은 마(馬)씨로 많이 개명했다. 마호메드(Mahomed), 무함마드(Muhammad), 마흐무드(Mahumud), 마수드(Masud) 등 아랍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의 시작 부분에 "마"자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세기 이후 중국 동남부에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의 80%가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이 되는 길을 버리고 인근의 동료들이 있는 동남아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일부는 동방의 유토피아로 일컬어지는 신라를 찾아 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처용을 아랍, 페르시아의 바닷길 상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광저우 다음으로 무슬림 상인들이 많이 찾아드는 항구는 천주(泉州)였다. 이곳은 이미 예언자 무함마드와도 연관이 있었다고 한다.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에서 김정위씨의 칼럼에 눈길을 끄는 기록이 있었다. 그 내용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한창 포교 사업에 종사하던 618년에 중국 연안에 아랍 상인들이 많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네사람의 제자를 중국에 보냈다. 한명은 광주로, 두명은 천주(복건성), 또 한명은 그후에 양주로 파견하였다. 그들의 무덤도 현재 남아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네 선교사의 파견에 대한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증빙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평이었다. 10세기경에 아랍인들이 중동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져와 이 도시에 심었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올리브 숲을 변했다고 한다. 자이툰(Zaytun)은 아랍어로 올리브라고 마르코 폴로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신라에서 페르시아가 어떤 나라였는지를 한번쯤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직, 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나라였다.
• BC 3-4세기 아케메네스 왕조때 말머리 각배라는 뿔잔이 소개되었는데, 복천동에서도 유사한 모양의 말머리 각배가 있고 가야의 말탄 무사 각배, 창녕의 뿔잔, 미추왕의 뿔잔이 나온다.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우리에게 제공한 문화유산이었다.
• 페르시아에는 신라의 세공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4가지 세공 기법이 있었다. 1)누금기법, 2)감옥기법, 3)타출기법, 4)투조기법이었다. 황남대총 북분의 은그릇 아나히타 여신상은 투조기법의 의해 탄생한 걸작품이었다.
• 한무제때 장건이 들여온 석류, 포도, 파, 마늘, 참깨, 수박, 참외, 오이, 호도, 호마, 호과, 홍화(연지의 원료), 개자리, 설탕(고려 명종때 인도에서), 소주(고려때) 등이 페르시아를 통해 들어왔다.
•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배운 입수 쌍조문 무늬.
• 25점의 로만 글라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대총과 합천 옥전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그중의 으뜸은 황남대총 남분의 봉수형 유리병 오이노코에(Oinochoe)로 시리아 동부 연안에서 제작된 술주전자다. 병의 손잡이를 귀한 금실로 감아 보강한 이유는 금실보다는 로만 글라스가 더 귀한 것이 이유이고 유리병을 매장자의 목부위에 위치하게 한 것은 이 유리병이 제일 가치가 있는 보물이라는 뜻이다.
• 신라 38대 원성왕릉(785~798). 왕의 시신을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쾌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왕릉의 무인석이 턱수염이 무성하고 눈이 깊고 코가 높은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신라 42대 흥덕왕릉(826~836). 업적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한 것이다. 역대 신라 왕릉중 가장 잘된 왕릉으로 둘레석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무인석은 원성왕릉의 쾌릉처럼 턱수염이 무성하고 눈이 깊고 코가 큰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무릎 꿇은 나무 2021.12.20
문득 '소리와 공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리라는 것이 귀에 울리는 울림이라면 어쩌면 공명은 마음에서 울리는 울림이리라. 번잡한 도시에서 바삐 움직이는 발걸..
한담객설閑談客說: 눈이 녹으면 2021.12.20
지난 여름엔 소나기가 잦았다. 시도 때도 없이 천둥치고 번개마져 번쩍였다. 덕분인가 가뭄들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비가 넉넉히 온 덕분이다. 보스톤엔 겨울 초..
처용은 누구인가? 2021.12.20
당숙종 3년 758년 중국 남쪽 해안도시 광저우(지금의 홍콩, 선천) 지역에는 페르시아, 아랍 상인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살고 있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히..
보스톤 레스토랑 등 실내업소 백신 의무화 2021.12.20
미셸 우 보스톤 시장은 보스톤 시내 모든 실내 영업장소에서 백신 접종 증명을 의무화하고 동시에 1만8천 보스톤 시 공무원들의 백신접종도 의무화했다. 2022년 1..
맨신, 사회복지예산 지지 못해...백악관 즉각 반박성명 2021.12.19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조 맨신 연방상원의원이 바이든 대통령의 BBB 법안을 지지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같은 일요일인 19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